기업인수 심사 때 핵심공급망·첨단기술 영향 고려
미국이 외국인의 미국 기업 인수를 승인할 때 해당 거래가 국가 안보와 첨단기술 공급망에 미칠 영향을 더 면밀히 검토하기로 하면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5일 공급망 및 핵심 기술 보호를 위해 외국인 투자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철저히 감독하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외국인 투자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때 핵심 공급망, 첨단기술, 투자 동향, 사이버보안, 미국인의 개인 정보 보호 등 5가지 요인을 고려하라는 지침을 담았다.
백악관은 “미국 안보를 저해하려는 국가와 개인의 행태를 비롯한 국가 안보 환경이 진화함에 따라 CFIUS의 심사 절차도 진화해야 한다”고 이번 행정명령 발동 배경을 설명했다.
CFIUS는 외국인의 미국기업 인수합병 등 대미 투자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심사해 안보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기업이 그 문제를 해소한다는 조건으로 승인하거나 거래 자체를 불허할 수 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미국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첨단기술을 손쉽게 확보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판단에 따라 CFIUS를 통해 중국의 미국기업 인수 여러 건을 좌절시켰다.
CFIUS는 원래 외국인이 지배적인 지분을 확보할 경우를 심사 대상으로 했지만 2020년에는 외국인이 소수 지분만 인수하더라도 핵심 기술이나 시설, 민감한 개인 정보 분야 기업의 지분을 확보하면 심사 대상에 포함하도록 권한을 확대해왔다.
이번 행정명령도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한국을 비롯해 미국에 투자하려는 외국 기업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행정명령에는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 논란 등을 의식해 이번 조치의 대상이 중국과의 거래로 특정돼 있지 않고 CFIUS의 심사 대상이 되는 모든 거래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미국은 공급망을 견고하게 하는 데 있어서 동맹·파트너와 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특정 외국인투자는 미국을 미래 공급망 차질에 취약하게 만들어 공급망 강화 노력과 국가 안보를 저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기업이 첨단기술을 보유한 미국기업을 인수하려는 경우에도 CFIUS는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더 까다롭게 심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백악관이 공개한 내용을 보면 외국기업에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CFIUS가 앞으로 더 면밀히 들여다볼 것이라는 자체가 심사를 준비하는 기업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또 CFIUS가 한국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를 심사할 때 해당 한국기업의 중국사업 등 중국과의 관계를 세밀하고 주의 깊게 파고들 수도 있다.
실제로 행정명령에는 외국인과 ‘제3자와의 관계’(third-party ties)도 고려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워싱턴의 통상 전문가는 “CFIUS가 한국기업만 더 까다롭게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기업이 미국 첨단기업을 인수하는 게 전반적으로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기업이 첨단기술 분야 대미 투자를 확대하면서 CFIUS 심사를 받는 경우도 잦아지는 편이다. 현대자동차는 로봇 전문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하고, 양자컴퓨터 스타트업 아이온큐(IonQ)에 투자할 때 CFIUS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SK하이닉스는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인수할 때 CFIUS 승인을 받았다.
CFIUS가 발간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작년에 핵심기술 거래 총 184건을 심사했는데 국가별로 보면 독일(16건), 영국(16건), 일본(15건), 한국(13건) 등으로 한국이 네번째로 많았다.
다만 CFIUS는 일부 우방에는 좀 더 관대한 편이다. 미국이 중심이 된 군사동맹 및 정보네크워크인 ‘파이브 아이즈’에 속한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은 외국인투자의 안보 위험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제도를 두고 있고 미국과 잘 협조한다는 이유로 ‘예외 국가’로 지정해 일부 규정 적용을 면제하고 있다.
다만 예외 국가라도 일반적인 투자에 대해 신고 의무를 면제받을 뿐 미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기술·시설·데이터 관련 투자는 여전히 신고해야 한다. 현재 미국의 주요 투자국 중 한국을 비롯해 독일, 일본 등도 ‘예외국가’로 지정돼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