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강력한 귀족 계급과 향사계급의 출현을 막은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이들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변방으로 나가서 새로운 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연안 지역의 지배층들은 주민들이 대거 변방으로 나가지 않도록 달래기 위해 정치 제도와 토지 무상불하 및 종교적 관행을 자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착민들의 변방 산기슭으로의 이주는 아메리카의 미래에 대해 엄청나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아메리카의 미래를 위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식민시대에 마련된 교육과 문화의 토대였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매사추세츠의 베임브리지에 설립되었다. 17세기말 경에 윌리엄 베리 대학이 버지니아에 설립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코네티커트 대학이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예일 대학교의 전신이다. 더욱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정부 당국이 운영하는 학교망의 증가였다. 청교도들이 성경읽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문자해득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647년에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격몽'법을 제정하여, 50 가구 이상이 모여사는 읍마다 고전문법 학교(대학진학을 위한 래틴어 학교)를 설립케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쥬잉글랜드의 모든 식민지들이 이 제도를 따랐다. 뉴잉글랜드로 맨먼저 이민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서를 가지고 왔고, 런던으로부터 책을 계속 수입했다. 1680년대에 들어서서는 보스턴의 서적상들은 고전문학, 역사, 정치, 철학, 과학, 신학 및 훈문학 분야의 서적들을 팔아 번창하고 있었다. 1639년에 영국 식민지 최초의,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두 번째의 인쇄기가 하버드 대학에 설치되었다. 1683년에 펜실베이니아 최초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와 부기법을 가르쳤다. 그 후 퀘이커교도사회에서도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고전 언어, 역사 및 문학 분야에서의 상급 교육은 '교우학교'에서 실시되었다. 이 학교는 필라델피아에 아직도 ' 윌리엄 펜학교'로 남아서 운영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 많은 사립학교에서 언어, 수학 및 자연과학을 가르쳤고, 성인들을 위한 야간 학교도 있었다. 여성들의 교육도 전혀 되외시된것은 아니었으나 여성의 교욱 기회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교육에 국한되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집 딸들은 개인 교사로부터 음악, 무용, 그림 그리기, 노래, 문법 그리고 때로는 부기법도 배웠다. 18세기에 펜실베이니아에서 이루어진 지적, 문화적 발전은 대체로 두 사람, 즉 제임스 로건과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력적인 인품을 반영한 것이었다. 로건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장관이었다. 젊은 프랭클린이 최신 과학 도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훌륭한 서제에서였다. 1745년에 로건은 자기의 장서를 진열하기 위한 건물을 시워서, 그 건물과 장서를 자기의 사후에 필라델피아시에 기증하기로 했다. 프랭클린은 필리델피아의 지적활동에 더욱 더 큰 공헌으르 했다. 그는 토론 클럽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미국철학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의 모태가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한 공립 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후일에핀셀베이니아 대학교로 발전했다. 그는 회원제 대출 도서관을 창안해서 그 설립을 도왔는데, 그는 이것을 가리켜, "북아베리카의 모든 회원제 대출 도서관의 모태"라고 말해다. 남부의 식민지에서는 부유한 대농장주와 상인들이 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로부터 가정교사를 데려와서 가지들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또 자녀들을 런던으로 유학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연안 지방의 상류계급은 공립학교 교육을 지원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농장과 중간 크기의 농장들이 확산되어 있어서 지역사회 학교를 설립하기가 어려웠다. 버지니아에는 기부금으로 설립된 무료 학교가 몇 개 있었다. '심스 학교'는 1647년에 설립 되었고,' 이튼학교'는 1659년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욕망은 기성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방에 사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은 원시적인 통나무 오두막에서 살았지만 학문을 숭상하여, 학식이 풍부한 목사를 자기들의 정착지로 모셔가려고 무한히 애를 썼다. 식민지의 문필활동은 대체로 뉴잉글랜드 지방에 국한되었다.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코튼 메이더는 약 400편의 글을 썼다. 그의 명작인Magnalia Christi Americana는 뉴잉글랜드의 역사를 현란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