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에 개봉된 영화 중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라는 작품이 있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이 영화는 흥행도 잘되었지만 작품성도 뛰어났다. 우리들 인생은 갓난 아기로 태어나 늙어 죽는 게 정상인데 반해 이 영화의 주인공 피트는 정반대의 삶을 살다가 가는 인생이었다.
요약하자면 갓난 아기는 갓난 아기인데 쪼글쪼글한 노인으로 태어나 죽을 때는 갓난 아기로 죽는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다. 피트는 한창 청춘일 때 여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것 까지는 행복이었는데 그때로부터 남편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역순으로 점점 더 싱싱해진다.
아내는 보통의 인생으로 살며 성숙해지고 늙어가는 데 비해 남편은 청춘의 때에서 사춘기 소년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니 이런 부조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작별하게 된다.
기막힌 인생 벤자민 버튼은 드디어 소년에서 사춘기를 거쳐 마침내 강보에 누워진 갓난 아기가 되었으나, 그의 속사람은 온갖 성인병과 노환으로 시달리다가 노인으로 눈을 감는다는 스토리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을 하려는 건 아니고 다만 그 총체적인 설정에 감탄하는 것이다. 인생이 태어나 늙어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젊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설정은 대단히 무리한 플롯임은 분명한데, 그러나 말이다. 우리 인생들은 한번 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필자도 아침저녁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 망연히 서있는 노인이 이제는 그만 늙고 하루하루 젊어진다면 어떨까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이따금 한다. 그렇게 될 때 파생하는 문제가 엄청나겠지만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 그런 현상에 대한 깊은 고뇌를 따로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젊었을 때의 그 파릇한 얼굴로 돌아간다는 상상을 해보며 나만의 미소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것은 후회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반추하면서 “아, 거기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라는 후회의 편린들이다. 그 부분을 지우개로 지우고 고쳐가며 살 수만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삶의 흔적을 거울 속에서 보았을 것이다. 차라리 다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 밀물처럼 밀려온 엄청난 행운들이 사실은 실패로 가는 썰물의 함정이었음을 알아차려야 했다. 아, 그때 왜 나는 그 기회를 좀 더 기다리지 못했을까. 그 레스토랑이 아니고 그 옆에 있었던 카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야 했는데, 이 길목이 아니고 저쪽 대로로 갔어야 했는데, 그러나 인생은 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회 위에 우리는 삶이라는 인생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생은 단언한다. “나는 후회가 없다!” “내 인생 사전엔 후회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이런 거짓말을 태연히 하는 그 얼굴을 향해 고두심은 말할 것이다. “잘났어, 정말!”
그렇다. 후회가 없다고 장담하는 인간일수록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지 모른다. 아니 인생자체가 출발부터 후회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선악과를 따먹은 입을 봉해버리고픈 아내의 후회는 얼마나 처연했을까. 남편은 아내가 준 선악과를 넙죽 받은 손목을 분질러 버리고픈 후회로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으리라.
후회, 그래서 인생은 탈출구가 필요한지 모른다. 후회라는 미묘한 삶의 틈을 통해 비추이는 빛. 그것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준 삶의 모멘트이다. 후회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후회할 때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그 시간에 그나마 내 존재의 의미를 성찰한다.
R 헨리가 말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나면 반드시 그 결단을 후회하게 된다. 그 후회를 얼마나 잘 견뎌 내느냐가 결단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수많은 결단을 내렸으며 동시에 수많은 후회의 조각들을 늙은 얼굴에 주름으로 갖춘 셈이지만, 그 주름은 신이 마련해준 격려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신석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