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하얀 백발의 어울림이 풍채와 삶의 깊은 고찰이 내재된 분을 뵙게 되면서 은근히 백발이 성성할 날이 기다려진 적도 있었다. 나이들어버린 매무새가 초라하기 보다 삶을 통찰한 나머지 초연한 경지의 사색이 스며들어 있어, 노년을 반가이 맞이들일 것 같은 평안함의 상징이 무량한 달빛처럼 고요하고 담담한 평온의 빛결이 밀려든 고고한 백발의 멋을 발견했을 때였나 보다. 덧 없는 세월을 곱게 차려입듯 백발 성성한 나이로 접어들었다. 예전 궁중에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공손하고 경건하게 예를 올리던 사은숙배처럼 머리에 내린 서리가 하얀 백발로 변신되자 배꽃 같기도 하고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산 벚꽃처럼 세상 어느 꽃보다 눈이 부시다. 마치 편안한 노년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증명서라도 받은 기분이 든다. 귀밑 머리가 백발로 헝클어진 채로 편한 데로 쉽게 남은 날들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학교 시절, 푸르렀던 젊은 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세월을 어찌 그리도 잡아 두려 했을까. 두 주먹으로 힘껏 움켜 쥐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었는데, 높은 산에 올라 두 손을 마구 휘저어 보아도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메아리만 파고들고 늘 그 자리에 오두마니 서 있기만 했던 것 같은데 세월이 유수다.
백발은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휘돌아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려 무공해 노인 자리를 누릴 수 있는 길목에 당도한 셈이다. 백발이 자라는 동안 한결 홀가분하게 한층 더 남은 날들을 대수롭지 않게 거추장스럽지 아니하게 가볍고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염료로 흰 머리를 감추고 살아온 세월에 비해 백발은 한 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웬만한 주책이나 실수까지도 쉽게 용납받고 이해받을 것 같은 만용이 꿈틀거린다. 백발은 더욱이 담숙한 멋을 지니고 있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루어내야 할 일도 없는데 마냥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던 방만한 참 자유를 누리며 백발이면 어떠하리 그냥 내버려두어 보자.
언제가 백발의 내 모습을 만나게 되면 인생의 긴 연습을 끝 내느라 애썼다고 다독여 주기로 했다. 연습처럼 고되고 힘든 것은 없지 않은가. 인생이 연습 없는 일회성 무대가 아니었기에 다행이다 싶다. 인생은 매일 매일이 연습이고 본 무대에 서는 일이었다. 유년의 부끄러움이 연습이었고 여학생 시절의 수줍음의 연습이 매일매일 쌓여가면서 청년 시절의 본 무대에서 푸름과 뜨거움을 열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서 감사해온 것은 연습이 허용되는 무대가 인생이라서 얼마나 백골난망인지. 마지막 하직하는 날까지 연습이 가능하고 용인되는 무대가 백발까지도 용납해주지 않은가. 세상으로부터의 외면도 눈여겨 보지 않아도 되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백발이 고맙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하긴 그렇다. 첫 외손녀를 만났을 때 ‘아가야 외할머니셔’ 하면서 맏사위가손녀를 품에 건네주던 날, 그 할머니라는 부름이 나였다는 사실 앞에 하마터면 사랑스런 손녀를 떨어뜨릴 뻔 했던 기억이 새롭듯 떠오른다. 군중 속에서도 ‘엄마’라는 부름이 들렸을 땐 얼른 돌아보게 되지만 ‘할머니’라든지 ‘어르신’이라는 부름 앞에서는 잠시 멈춘 후에 그리 바쁘지 않다는 듯 서서히 돌아보게 되는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백발이 생의 면류관처럼 자랑스럽지 만은 않은 조금만 더 천천히 나이 들고 싶은 애틋한 단적인 표현이 어느새 기웃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젊은 날들이 실종되어 버린 듯한 몽롱한 의식 속에 지금껏 살아온 이 모두가 연습이었으면 싶다. 연습을 끝내고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날이면 더는 실수도 줄어든 깔끔한 뉘우침 없는 감회로 만족스러운 뜨거운 박수를 보낼 수 있을 터인데. 인생은 연습 없는 일회성 무대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어서 백발을 머리에 이고도 감사가 우러난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연습으로 이루어지고, 본 무대에 올려지고 다시 일상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지워가며 연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는 일을 허락받은 축복의 길이 매일매일 열려있기에 남은 날 동안에도 끝없는 연습 기회가 용납되는 날들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 더욱이 감사가 넘치는 밤이다. 하루를 닫으며 올려드리는 마지막 묵상의 시간 앞에 마음 여백을 넓혀갈 수 있는 연습에 심중을 열어 두기를 소원 드리게 된다. 백발처럼 하얀 삶의 바탕 위에 살아온 흔적에 조차도 마음을 두지 않으며 비워내는 연습에 열중하기로 했다. 백발 사은숙배(謝恩肅拜)조차도 긴 연습 끝에 얻어진 축복이라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