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잘 아는 분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태였는데 가족이 오랫동안 몰랐던 것은 ‘알츠하이머 치매’가 아니라 ‘전두측두엽 치매’였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우리가 흔히 아는, 자신을 잊고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기억과 일상생활의 장애인 반면, 전두측두엽 치매는 기억력은 있으나 성격이 폭력적으로 변하고 행동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많은 경우 노화현상인줄 알고 지나치기 쉬운 질환이다.
증세가 심해지자 그 분은 전문시설로 옮겨졌다. 밸리의 5베드룸 주택에서 중년의 한인부부가 치매환자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한 달에 4,000달러라 해서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보니 간병인들의 노고가 장난이 아니었다. 노인마다 성격과 생활습관과 식사패턴이 달라서 하루 종일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화장실 못 가리는 노인은 때마다 욕실에서 씻긴다고 했다. 그런 시설에 한번 들어가면 그렇게 몇 달에서 몇 년을 갇혀 지내다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어느 집이나 부모나 조부모, 시부모 중에서 누군가가 아프거나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려서 가족들이 애쓰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 치매가 큰 문제다. 국제알츠하이머병연맹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환자는 2009년 3,500만명이었는데 2023년에 5,500만명이 되었고, 2030년에는 7,800만명이 될 것이라 한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과 의학도 치매의 치료제만큼은 아직껏 못 만들고 있으니 앞으로 이 문제는 최대난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로선 가족이 돌보거나 전문시설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하지만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치매환자는 24시간 돌봄과 감시가 필요하니 누군가의 전적인 희생이 필요하다. 또 요양시설에 보내려면 은퇴자금을 다 소진할 정도로 큰 비용이 든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비록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라 해도 인생의 마지막 날들을 격리시설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부모나 배우자를 보내놓고 죄책감과 불안감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외곽에 ‘호그벡’(Hogeweyk)이라는 ‘치매마을’이 있다. 아담한 주택들과 카페, 극장, 마켓, 레스토랑, 공원, 미용실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곳은 여느 평범한 마을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곳의 주민들은 중증 치매환자 188명과 ‘사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 250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27채의 주택은 네 가지 스타일로 꾸며져 입주민의 취향에 따라 배정된다. 한 집에 환자 6~7명이 간병인 1~2명과 함께 사는데 환자들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낸다. 텃밭을 가꿀 수도 있고, 카페나 공원에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도 있으며,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거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마을에서는 환자가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마을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돼있고 주변에 항상 안내하는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관리진은 1시간마다 모든 사람의 동선을 파악한다.
그러니까 일면 영화 ‘트루먼쇼’의 무대 같은 곳이다. 주인공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느라 주위의 모든 공간이 세트요, 친구와 이웃들은 죄다 연기자였던 것처럼 치매환자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쇼’를 하는 맞춤 공간인 것이다.
호그벡 빌리지는 전통적인 노인요양원에서 일하던 이본 반 아메롱겐이 2009년 설립했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요양원 직원들이 모두 “우리 부모님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절대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치매환자들이 사회와 단절되지 않고 의료시설 같지 않은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호그벡은 그렇게 탄생했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가능했다. 입소비용은 소득에 따라 500~2,500유로까지 내는데 복지수준이 높은 네덜란드에서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니라고 한다.
호그벡 마을을 세계 각국이 벤치마킹하면서 유사한 개념의 마을과 커뮤니티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2020년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랑데 알츠하이머’(Landais Alzheimer)가 오픈했고, 같은 시기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카르페 디엠’ 치매마을이, 호주에서는 ‘마이크로타운’ 커뮤니티가 문을 열었다. 스위스 역시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독일은 2만 명 단위의 주거지역마다 장기요양센터를, 일본은 다기능 돌봄주택을, 영국은 치매카페를 오픈함으로써 지역사회와의 자연스런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설을 미국에서도 기대할 수 있을까? 작년 여름 뉴욕타임스가 호그벡 마을에 대해 보도했을 때 댓글이 1,037개나 달렸을 정도로 지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세금을 적게 내는 자본주의사회 미국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못할 꿈같은 이야기”라는 회의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정부는 무관심하고, 사기업들은 이윤에만 눈이 어둡고, 치매환자들은 통제 불능이고,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는 절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그리고 상당수는 치매에 걸릴 것이다. 뻔히 보이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큰 바람일까?
<정숙희 LA미주본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