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너가 있어 새로운 세상으로 가득한 설렘이 있다. 너에겐 풋풋한 이웃들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먼 나라 이웃나라의 울고 웃는 믿기 힘든 세상도 있다.
가끔은 내 나라 내 고향의 기분 좋은 승전보에 얼싸안고 환호도 하고, 알만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나 때론 당찬 소신 발언으로 속이 뻥 뚫리게 하는 너가 있어 얼마나 고맙고 신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지.
내 어릴 적 아침은 건넌방 아버지 신문 뒤적이는 소리와 진한 잉크 냄새로 시작되었다. 간간이 내지르시는 울 아버지 거친 반응은 덤으로 들으면서 말이다.아, 신문에는 어릴적 추억이 가득하다. 그 시절 신문은 부지런한 중고교 학생들의 흔치않은 아르바이트 수단이었으며 복잡한 거리나 버스 안에서도 신문을 팔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두 남동생도 새벽에 집집마다 신문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시절 신문은 모두의 아침이었고 어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최고의 통로였다.
지난 월요일, 오랜만에 비 개인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화창한 날이었다. 아침 산책 겸 몸살이 났다는 가까운 지인 댁에 병문안 겸 방문을 했다.
동백꽃이 만발한 지인 집 앞에는 벌써 이른 봄꽃들이 만발하여 눈부신 햇살이 꽃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파랑새 한 쌍이 이른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역시 집도 집 주인 닮아 사랑스런 풍경이구나 싶었다.
그때 어렴풋이 현관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얼른 주워들고 보니 ‘한국일보’였다.
아! 커피향보다 더 구수한 고향 내음이 났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아침 냄새’였다.
미국에서의 조간신문, 새벽은 아니지만 집 앞까지 배달을 해주다니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벨을 누르고 “신문 입니다!” 우렁차게 불러봤다.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으시며 문을 여셨다. 얼굴을 마주치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얼싸안고 웃음으로 아침 인사를 했다. 평소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애칭 ‘여보야, 부부’이시다.
신문을 내밀며 “언제부터 한국일보를 보셨어요?” 묻자 “아마 사오십년 될 껄” 하신다. “와~우!”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여보야 부부께서 이곳 치코로 오신 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한국일보를 보셨다고 했다.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신문을 봐야지” “난, 한국일보 팬이야!”
다시 한번 감탄은 물론 역시 자존감이 강하신 분은 삶이 다르구나 싶었다.
이곳은 시골이라 신문 배달도 쉽지 않은 경로로 온다 하시며 배달하는 사람도 오래됐다고 하셨다.
매년 크리스마스면 오래 전부터 배달해주시는 분께 조그만 감사 인사를 하신다고 한다.
요즘처럼 TV, 라디오, 컴퓨터로 쉽고도 초고속 시대에 웬 신문인가 싶지만 나도 활자로 된 신문이 좋다.
오늘 아침에도 그 집 앞에는 새 얼굴하고 신문이 와있겠지. 어제도 왔었고 오늘도 왔고 내일도 올 것이다. 한국인의 자긍심을 가득 담고서.
<김미라/버클리 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