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음에 잠길테요
삼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한해는 다 가고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시 김영랑 1903__1950)
김영랑 시인의 명시 ‘모란이 피기 까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다시 불러보고 싶은 시이다. 1917년부터 시를 쓴 영랑 시인은 정지용, 박종화 시인들과 더불어 한국시의 문단을 꽃피운 시인이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종로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그때 받은 총상으로 47세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내고향 강진 시인으로 내겐 남다른 향수가 저민 시인이다. 남도 천리 유배지로 유명한 강진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를 쓴 김영랑 시인은 빼앗긴 민족의 아픔을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쓴 시가 ‘모란이 피기 까지는’ 시이다.
더욱이 내고향 강진 시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의 봄을 기다리는 시인이요, 내고교 시절엔 강진에 ‘모란 다방’을 사복을 입고 몰래 드나들던 소녀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김영랑 시인의 첫사랑이 나의 모교 숙명 선배 납북된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였다. 최승희 사진은 숙명의 순헌관에 지금도 절세미인의 검정치마 흰저고리의 모습이 옛 모습 그대로 남겨져있다. 영랑 시인의 아들이 쓴 책 ‘아버지 그립고야…에는 일제 탄압에 조국 해방을 그린 시 ‘모란 시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랑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나 한듯 ‘이제는 내차례일세’하며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듯 ‘레퀴임’을 즐겨 들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고한다. 한겨레 저널 초대 발행인 영랑 시인의 셋째 아들은 어느날 우연히 내가 강진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고 날 찾아와 ‘아버지 그립고야’책 한 권을 주고 가셨다. 부족한 나의 ‘솔 그림’을 보고 좋아 하시기에 드렸더니 그 그림을 가슴 품고 가시며 강진의 유품이라 얼마나 좋아하시든지…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잠이 든 땅끝마을 강진에 김영랑 시인이 남긴 시의 혼은 다산과 더불어 시의 혼을 일깨우고 강진 석문산 기슭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은 문장가 다산이 뿌리고 간 문학의 혼이 후세에 남겨져 있다. 청산에 하늬 바람, 한줌의 흙도 다른 내 고향 강진에는 유배지로 다산의 피가 후손에도 흐르고 추사 김정희, 윤선도, 초의 선사 등 우리 조국의 거물들의살다 간 시의 혼이 지금도 시의 혼이 살아 숨쉰다. 시는 영혼의 모음으로 가슴이 살아 있는 맑은 선비의 혼으로 쓰여져야 하며 마음에 항상 만 백성을 사랑하며 혜택을 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자란후에야 독서를 통해 마음에 한 생각이 떠 올라 시가 떠오르고 시인이 될수 있다.
내고향 모란의 시인, 찬란한 봄을 기다렸던 영랑 김윤식 시인을 마음에 추억하며 오늘은 홀로 쓸쓸히 솔을 껴안고 ‘천인 무성’ 침묵의 가슴 으로 나의 봄을 기다리며 ‘김영랑 모란 시인’의 그리움 전한다.
''묘비명''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아래 빗돌 세우오
초조른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여진 고층에 자조 떠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외롭던 내곁에 쉬어다가라
한되는 한마디 삭이 실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