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게 파급력이 큰 뉴스가 타전될 때 항상 따라붙는 표현이 있다. ‘극비리’와 ‘전격’이다. 이달 14일에도 두 수식어를 모두 앞세운 소식이 있었다. 극비리에 진행돼 전격 발표된 쿠바와의 수교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됐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 여정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냉전 시절 사회주의권 맹주 소련과 1990년에, 북한 혈맹 중국과 1992년에 이미 국교 수립이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쿠바와 공식적으로 손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말 길고 지난했다. 중남미를 담당했던 전·현직 외교관들은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데탕트, 탈냉전과 신냉전 시기를 거치는 내내 미완성 과제처럼 남아있던 남북 대결 외교는 이렇게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외교가의 흥분과 달리 국민들의 반응은 극비리와 전격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뜨뜻미지근했다. 국민들은 오히려 비슷한 시점에서 터져 나온 아시안컵 축구 국가대표팀 내홍과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경질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쿠바와의 수교를 ‘사회주의권 외교의 완결판’이라며 큰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대통령실은 기대 이하의 여론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나흘이나 지난 18일 ‘한국·쿠바 수교에 따른 분야별 기대 효과’를 담은 보도자료를 추가로 냈다. 64년 지기 쿠바의 배신에 북한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식의 남북 대결 구도를 강조하기보다는 한국 기업의 새 진출 무대가 생겼다는 데 방점을 찍는 게 홍보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뒤늦게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결 외교의 의미가 국민들의 관점에서는 이미 흘러간 옛 노래가 됐는데 정부는 시대 흐름을 못 읽고 뒷북을 친 셈이다.
물론 국민들의 관심도가 낮아졌다고 해서 남북 대결 외교가 가지는 의미를 저평가할 수는 없다. 쿠바 외교로 막을 내리기 전까지 수십 년 지속됐던 남북 대결 외교는 세계 곳곳에 크고 작은 비화를 남겼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외교관들의 탈출 실화를 다룬 2021년 영화 ‘모가디슈’만 해도 결코 과장된 내용이 아니다. 또 매해 봄이 되면 당해를 기점으로 30년이 지난 외교문서가 봉인 해제되는데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소임을 다해야 했던 당시 외교관들의 고충이 소상히 전해진다.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물론 경제력도 높아졌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미 북한과 경제력이 50배 이상 벌어진 상황에서 우리 외교의 초점이 단순히 남북 위상 대결 구도에만 머무른다면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른 영역에 외교 역량을 더 많이 쏟아야 한다. 대통령실이 뒤늦게 감을 잡은, 바로 그 경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순방 때마다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외교를 소홀히 한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매번 대기업 총수들과 동행하며 순방국의 정재계 인사를 만나게 해주고 있고 눈에 띄는 수출 성과도 내고 있는 점을 경제외교의 증거로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디테일 면에서도 현재 경제외교 방식이 우수하다고 자평할 수 있을까.
사실 대통령 순방 때 윤 대통령 최측근에 자리하는 총수들은 재계 서열 최상위권이다. 이들의 기업은 정부의 외교적 도움 없이도 자력으로 해외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역량을 종합적으로 갖추고 있다. 오히려 기업 입장에서 총수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지역 대통령 순방에 동행하는 게 비효율적인 사례가 적지 않다.
정부의 외교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기업은 따로 있다. 해외시장에 도전하고 싶지만 모든 면에서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주저하고 있거나 이미 한두 차례 좌절을 겪은 중소기업과 벤처 스타트업이다. 이들에는 정부의 작은 지원도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수년 전 케냐에서 열린 양국 비즈니스포럼에서 만난 한국 스타트업 직원과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본다. 경유까지 하면서 17시간 넘게 날아오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전혀요, 이런 기회가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훌륭한 외교관은 한 눈에는 망원경을, 다른 한 눈에는 현미경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큰 그림은 물론 작은 기업의 미래까지 촘촘하게 챙기는 경제외교를 기대해본다.
<정영현 서울경제 성장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