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기상 이변으로 불규칙하고 불안한 날씨가 참 많은 가르침을 주는 요즘이다. 뉴스마다 심한 피해상황들이 쏟아지는데 다행히 집 근처에는 큰 피해가 없을 것 같다는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국지적으로 곳곳에 비가 내리고, 가뭄에 시달리기도 하고, 지진이 발생하고 걱정은 끝나지 않지만 심한 시기가 일단 지나갔다는 소식에 가끔씩은 다행이다 여기게도 된다.
영하를 향해 질주하다가 이따금 청명한 하늘이 열리는 틈을 타서 산책길에 나서 보기도 했다. 지난 밤 매섭고 거센 바람이 지나갔나 보다. 여기저기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주섬주섬 치우게도 되지만, 물과 바람의 힘을 새삼 깨닫기도 한다. 청명 해진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 색 임을 다시금 보게도 되고, 졸졸 대며 흐르는 개울물이 햇살에 반사되는 예쁜 반짝거림이 어찌나 예쁘고 감사한지. 벽돌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잡초가 신기하게 별 모양으로 초록을 보이는 것도 보게 되고 시시콜콜 작은 것들에서 큰 평안이 찾아옴에 나른한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겨울 숲이다. 계절 상징처럼 빈 가지인 채로 매서운 겨울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겨울 나무의 의연함에 곰비임비 자꾸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
겨울 나무를 정시하다 보면 앞 뒤 아래 위로 질서 정연한 듯 하면서도 자유롭게 뻗은 나뭇가지들의 어울림이 잘 매치된 앙상블 안배로 보인다. 다 비워낸 빈 가지의 매무새라서 더욱 돋보이나 보다. 어느 나무라 할 것 없이 기막힌 균형과 조화로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룸의 규율을 지켜내고 있다. 한 쪽으로만 가지가 뻗어나온 것 같이 보이지만 반대쪽을 찬찬히 둘러보면 고르게 균형 잡힌 의연한 자태를 지켜내고 있다. 겨울 나무는 잠잠한 정적을 묵묵부답 묵비로 고요를 점철하고 있다. 정적이 흐르고 그 정적 속엔 인고의 묵언을 드러내 보이는 듯 하다. 내면으로부터 내비쳐진 고즈넉한 침묵이 장엄과 정숙을 품고있다. 겨울 나무는 더 이상 초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건한 엄격이 숨쉬고 있다. 위엄이 있는 장중함이 도리어 그윽하고 흔들림 없는 적막과 적요를 불러들여 더 없이 평화롭다. 다 비워 낸 초연이 성현의 모습이다. 잎이 무성했던 화려함의 극치를 누렸던 모습보다 다 비워낸 비움의 성스러움이 견줄 수 없는 각별하고 색다른 아름다움을 갖추게 해 주었나 보다.
바람 잘 날 없이 성가시게 빈 가지들을 번거롭게 괴롭히는데도 겨울 나무는 사려깊은 묵묵부답 명상에 잠겨 스스로를 가다듬는 수련 경지를 자초하는 신비주의를 택한 것 같다. 숲을 사뭇 흔들어대는 바람은 흘러간 세월을 견인해내려 하는데 세상은 같은 생각을 소유하지 않으면 모두 적으로 삼으며 돌아서 버리는 이원론 세상으로 몰아가고, 자아 팽창주의라는 극단적인 자아 사랑에 도취되어 자신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려 하는 시대로 급 물살을 타고, 외형 지상주의로 내보이기 위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 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팩트 제일주의 일색에 물들어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시대를 온통 장악하고 있는 이 거대한 사상이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도 겨울 나무는 수용하고 걸러내며 숲은 더이상 텅 빈 숲이 아니라며 나무들의 영일을 즐기고 있다. 겨울 나무의 의연함을 닮아 조금은 모남이 닳아져 모난 끝이 이웃을 찌르지 않도록 나목의 비움을 받아들이며 드넓은 둘레로 삶의 지경을 만들어 가라는 훈수를 받는 기분이 된다.
겨울 나무는 말없는 가르침의 교유를 손수 보여주고 있다. 빈 가지들이 마냥 침묵에 잠겨있는 것 같지만 다가올 계절로 하여 생동하는 생명력 잉태로 충만하다. 쉽게 드러내 보이진 않지만 숲의 존재 이후로 줄곧 은은한 추세만으로도 인류에게 희망과 살 맛의 기백을 덧입혀 주고 있었다. 생명력으로 한껏 담뿍하니 채워져 있고 벅찰 만큼 환희로 가득하다. 빈 가지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들을 완결 시점으로 받아들이며 순환 과정의 아픔 들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희망의 디딤돌로 삼아온 것이었다. 화려했던 초록이 삶을 기억해가며 나락의 길로 가랑잎으로 낙엽 짐 앞에 담대할 수 있는 용기로 흐트러지지 않는 자태로 절망을 그리움으로 다시금 순환할 것이라는 기억을 붙들고, 두 손을 하늘로 뻗고 견디어 내고 있었던 것을. 산을 지켜내며 들판을 보듬는 겨울 나무의 무궁한 삶의 지혜를 터득해 간다면 세상은 한결 평화스럽고 행복할 것이거늘.
나목 가지를 의지해 지어놓은 둥지가 어찌 위태로워 보인다. 잔가지들을 물어와 오밀조밀 지어놓은 보금자리가 얼마를 버텨내고 배겨낼까. 모진 바람 결에 밀려날 것 같은 둥지가 스산하고 궁색하지만 포근한 햇살이 내려앉은 정겨움이 애틋하고 다정스럽다. 가장 안전한 지점에 나무 중심점에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공교한 형평 택함이 비할 데 없이 절묘하다. 겨울 나무 비움이 겨울 산의 비움에서 시작된 것으로 비움의 여백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호롱불 하나 오붓하게 밝혀주고 싶음이여. ‘아낌 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 대사가 내 생애 마지막을 떠올리게 해준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겨울 나무는 어둡고 악한 세대를 역행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