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장미도 바빴다. 물론 발렌타인스 데이 때문이었다. 생산지에서 도매, 소매상을 거쳐 소비자에 이르고, 다시 연인의 손에 전해지기까지 장미는 화물기, 운송 트럭, 승용차 등을 부지런히 갈아탔다. 올해 통계는 아직 모르지만 지난해 발렌타인스 데이에 미국서 소비된 장미는 2억5,000만 송이(미 화훼가 협회). 붉은 장미가 65%였다. 만일 이번 발렌타인에 장미 다발을 선물 받았다면 그 장미는 십중팔구 남미산이었을 것이다. 발렌타인 장미 뒤에는 일반 소비자는 잘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전에 미국서 팔리던 장미는 거의 미국산이었다. 50여년 전 미국에는 800곳 가까운 상업용 장미 농장이 있었다(연방 농무부). 시장에 출하되던 장미는 연 5억 송이. 이런 장미 농장이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100여 곳에 불과하다. 꽃 시장에 출하되는 장미도 연 1,800만 송이로 팍 줄었다. 대신 미국산 장미가 사라진 빈 자리는 수입산이 차지했다. 지난해 미국에 수입된 장미는 28억 송이에 이르렀다.
세계 최대 꽃 경매시장은 네덜란드에 서지만 지금 미국에서 유통되는 장미는 네덜란드와는 관계가 없다. 수입선은 남미. 60%는 콜롬비아, 나머지 40%는 에콰도르에서 왔다고 보면 된다. 미국 장미 시장의 판도가 이렇게 바뀐 것은 마약 때문이었다.
콜롬비아 등에서 오는 남미산 마약 때문에 골치를 썩이던 미국은 마약 원료의 생산부터 차단하기로 했다. 코케인의 원료인 코카 나무는 안데스 산지의 전통 작물 중 하나. 각성 효과가 큰 작물로 콜롬비아 등에서 많이 재배됐다. 마추피추 관광에 나섰다가 고산증으로 고생하던 한인들이 현지에서 건네받기도 했다는 코카 잎의 추출물이 바로 코케인.
미국 정부는 코카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는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1990년대 초 콜롬비아, 에콰도르 두 나라와 무역진흥과 마약퇴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고, 종전 코카 생산국의 작물을 미국에 수출하면 무관세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 같은 정책이 불법 마약 차단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로 인해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는 본격적으로 화훼 산업에 뛰어 들어 여기서 재배된 꽃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흔히 대하는 남미산 장미(hybrid tea rose)는 지난 2011년부터 메이저 수퍼마켓에서도 팔리기 시작했다. 12송이 가격이 10달러 조금 넘는 정도에 책정됐다. 그 때 이후 수퍼마켓 장미 가격은 20% 정도 올랐으나 그 동안의 인플레 율이 35% 였던 것을 생각하면 수입산 장미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유지했다.
장미꽃 값은 계절 별로 오르고 내리는 폭이 크다. 지난해 저점이었던 8월의 수퍼마켓 장미 한 다즌은 8달러 대. 발렌타인스 데이 직전에는 23달러로 뛰었다. 물론 플로리스트 디자인과 고급스러운 포장이 더해진 전문 화원이나 꽃집의 가격은 이와는 다르지만 연방 농무부가 수퍼마켓 꽃값만 추적하고 있어 다른 공식적인 통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지난해 8월 화물기에서 내려 세관을 통과한 장미 가격은 한 송이 25센트, 시즌에는 40센트로 12송이 한 다즌의 도매가격은 각각 3달러, 5달러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마약과의 전쟁, 그 불씨는 미국의 장미 재배 농가를 직격했다. 미국산 장미를 시장에서 몰아낸 것이다. 하지만 장미를 찾는 미국인은 늘고 있다. 35년 전 연간 10억 송이 정도이던 장미 소비량은 3배 가까이 늘었다. 미국 성인 한 명당 10송이 넘는 장미를 받을 수 있는 물량이다. 지난 해는 물론 이번 발렌타인에도 장미 한 송이 구경 못한 사람도 많겠지만-.
참고로 장미를 비롯해 이번 발렌타인에 받은 생화를 화병에 꽂아 두면 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은 일주일 남짓. 카네이션과 국화류만 2주 넘게 두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