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인간 삶의 질적인 향상으로 인해 지금 시니어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 시니어의 삶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 귀하게 존중받고 있음을 감사한다.
나이 듦에 있어서 낙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위에 나이듦을 바라보는 현실적인 시각인 신체적 쇠약을 꼽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생각이 깃드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인간 정신생활과 신체적인 조건의 상태가 삶 전체의 균형을 이루는 인격체를 건강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건강한 의식을 지닌 삶의 긍정과 품격을 키우는 기회가 주어짐을 감사한다.
편향적인 시각을 불식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의 건강관리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왜곡된 인식과는 달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맑은 정신과 선한 감정을 지닐 수 있는 건강관리에 더 힘쓰며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위에서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인 허약한 모습만 보고 우려하며 비관적인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다.
주관에 치우쳐 객관성을 잃은 신중하지 못한 사람의 섣부른 판단력을 탓하며 마음 상할 것은 없겠다. 노년의 나이 듦에 있어 위축되지 않도록 자신을 다독이며 스스로 격려하고 있다.
자신의 실제적인 나이보다 훨씬 젊게 살려고 건강 유지에 더욱 힘쓰고 있다. 나이 들어도 젊은이 못지 않게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삶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젊었지만 늙은이처럼 고루한 생각에 머물러 편견과 고정관념에 찌들어 매사 부정적인 사유체계의 빈약함을 드러내면 젊음의 참신한 모습은 아니 일 것이다.
성경에 사도 바울이 ‘겉 사람은 쇠해도 속사람은 날로 변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음이 아닌가.
세속(상)적인 가치에 의한 삶의 외면적인 모습으로만의 평가가 아니라 인품의 열매 맺는 삶의 품격에 두어야 하리라.
노년의 나이에 이르러 삶의 고양된 영적인 의미와 내적인 고요와 평안을 누리는 희열에 찬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길 원한다.
필자의 경우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은 아니지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과 마음이 안정된 시간의 기쁨을 감사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에 평온이 깃든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음은 현실의 어려운 순간도 이겨낼 힘이 되니 더욱 감사한다.
‘힘들면 차라리 현재를 즐기라’는 조언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역경에 처해 있지만, 역경을 헤쳐나가며 삶을 개선할 의지가 있고 안정된 삶을 이룰 수 있는 날을 소망하고 있다.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1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은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운 삶이 아닌 어쩌면 현실적으로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삶일 수 있다.
애타게 (갈)구하는 기도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내적인 평안함을 말하고 있지 않나 싶다.
건강한 가치(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긴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건전한 자존감으로 순수한 생명력을 지니며 사랑의 정신을 실현한다.
삶의 다양성과 현실적인 측면의 불합리한 모순도 받아들이며 숱한 난제에서도 대안을 찾아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실함과 진정성을 지니며 사랑의 마음으로 용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겠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품의 덕목과 성숙한 삶의 성찰이 이러하리라.
진부하고 나태한 일상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움을 향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삶의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세계를 유지할 수 있음은 내면의 열정에 의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어떤 난관에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하여 나감을 스스로 체험하게 되지 않는가?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역동적인 삶이 전개되는 생명력을 지닌 인격체로 발돋움해야 하리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의 변화가 건강한 삶을 꿈꾸는 원동력이 될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