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임태주 시인 모친의 시)
나는 원래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 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아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다.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 알이 통통하게 물려 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로운 도라지 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리 없다.
나는 밥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고
가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는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듯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새끼들 불러
전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때
엄마는 왜 나를 외면하며 못본척 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네가 그일을 서러워 물을 때마다 나는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 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도리의 값어치보다 네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애미로써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 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 한여름 날씨같아서
비내리겠다는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 신명께 기댄다.
운수 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물살이 센강을 건널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며 건너야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며 애태우며 제속을 파먹고 살지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며 자랑하고 다녀라
……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라.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구나.
부질없고 쓸모 없는 것은 담아 두지 말고 바람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듯이 잘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 대로 순수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날
사이 사이 살구 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곱게 들어서 좋았다.
내 삶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 하지도 마라.(시,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
이 시는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쓴 시입니다.
삶의 지혜, 맑고 순수한 어머니 가슴이 시 속에 면면히 살아있어
새해, 새날의 지혜, 어머니 가슴으로 살고싶어 올렸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박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