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하는 분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삶이 소설 한 두 권으로는 어림없는 파란만장한 삶이었다고 강조하신다. 호흡하는 인생들 중에 소설 같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인생 살이란 누구나 골고루 곡절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삶의 현장은 성대하게 담론을 토론하는 상징적 가치에 있다기 보다 평탄하지 않은 만큼의 굴곡은 언제나 이듯 바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와중이라 삶을 미루어 도출해 낸 추론의 유추가 내겐 글쓰기 였다. 글쓰기 과정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교류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진가를 지각할 수 있었고, 삶의 비롯과 과정과 결과의 산물을 글쓰기로 이어 가면서 생의 이치와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얻어낼 수 있었음은 내가 치룬 노동에 비해 얼마나 성능 좋은 만족감이었는지. 영혼의 노동과 손 끝의 작업 노동이 지불한 쓸모에 비하면 얼마나 성취감 높은 노작 이었는지, 한마디로 삶은 글쓰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 필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가성비보다는 가심비 라는 신조어 트렌드가 알맞은 표현이 될 것 같다. 거기에다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작업이 글쓰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나를 지켜주었다.
한국일보 ‘행복한 아침’에 매주 토요일마다 칼럼을 올린 지가 14년을 넘기고 15년째로 접어든다. 기쁨에 겨웠을 때도, 마음이 쓰리고 슬픔을 품으면서도, 몸이 지치고 아플 때도 꾸준히 써왔다. 매번 컴퓨터 화면 앞에 앉으면 박사 학위 논문이라도 쓰 듯 긴장된다. 하얀 공백 같은 노트북 위에 인생이 이래 저래 꼬여버린 매듭과 어찌어찌 풍덩 빠질 것 같은 웅덩이를 피해가며 승복하 듯 이실직고로 고백해야 하는 일로 지금껏 살아 남아 존속하게 된 꿈같은 희열을 맛보곤 한다. 엄청난 정서의 자산을 불리는 과정을 통과하며 인류 문명이 남기게 될 역사 나이테를 만들어 가는 진통을 체험하면서 글의 소재를 불특정 분야로 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읽어내는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던 것일 게다.
어느 화가 분의 비망록이 떠오른다. “변명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자신감을 잃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보는 자연 색감을 낼 수가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림에 자신감은 잃었지만 이런 자연을 마냥 볼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 큰 감사를 드리게 된다. 예술을 즐기는 길이 굳이 창작하는 길만 있는 게 아닐 터이니까.” 그랬다. 글을 쓴다는 일도 때로는 접고 싶을 때가 있고 문득 문득 밀려드는 글 감들로 주체 못할 시간도 있었기에 화가가 붓을 놓고 쉬고 싶을 때 작가가 펜을 놓고 쉬고 싶을 때, 쉬는 것이 더 나은 다음 작품을 위해 필연으로 조처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때로는 잠깐 씩은 딜레마 구간도 있었지만 이러한 진퇴양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으로 글쓰기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닌 행동의 모토라 여기며 생각을 구차하게 늘어놓는 것을 극구 피해야 한다는 경지를 여러 번 넘긴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을 머리로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가슴에 쌓인 생각과 감성과 느낌들을 간결하고 익숙한 말로 풀어내는 일이라서 스스로 삼가해온 일들로 그 모퉁이가 많다.
주접도 피해야할 것이었고, 감성에 한결같이 줄곧 젖어 있지도 말고, 독자들을 훈계하려 드는 따위는 더욱 조심성 있게 삼가할 것이었다. 잡다하게 굳이 내세우려는 시도는 필히 경계해야할 것으로 경망과 경솔을 지긋이 누르며 짜임새 있는 요점과 핵심을 과녁 삼으며 독자 마음을 열 수 있는 공감에 동참할 수 있는 언어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글 앞에 앉아야 할 일이었다. 여린 새순이 잎을 내밀 땐 흙을 북돋우어 주고 얼마큼 자라면 솎아 주는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 또한 파종 시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기를 고려하지 않은 글은 뜬금없는 타령이 될 수 밖에 없음이다. 또한 초고는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편이지만 초고 작업 이후로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수 없이 거듭하며 작품 완성의 길로 긴 여로를 배회 하면서 퇴고에 공을 들이며 다시 읽어보고 다시 다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글이란 다듬을 수록 숙성되고 빛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치고 다듬는 필수 작업을 거치는 동안 즐거운 고통을 맛보기도 하면서 정점의 쾌감을 누리고 싶어서 라는 말은 줄이려 한다.
다시금 갑진년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면서 한 해 동안 부족한 글을 환대 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정중하게 인사로 올려드립니다. 또한 한 해 동안에도 한인 사회에 밀접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키워 오시며 헌신 해오신 한국일보 운영진 제위 모든 분들께도 다시금 새로운 도전으로 분투하시는 새해가 되시기를 기원 드리오며 계묘년 한 해 동안에도 많은 배려와 사랑에 많이 감사했습니다. 공손 함으로 새해 인사를 올려드립니다. “새해에도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모두 성취하시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빌어드립니다.” 계묘년 길 모퉁이를 돌아 갑진년 새로운 반전이 기다리는 지평선 너머로 Happy New Year 깃발이 펄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