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천주교·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불과 10㎞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속한 이곳은 예수의 탄생지로 유명하지만 올 성탄절에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70㎞ 떨어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유대교)과 하마스(이슬람교) 간 전쟁 여파가 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크리스마스에도 가자지구에서 공격의 강도를 높여 하루 새 수백 명이 숨지는 참사가 이어졌다. 10월7일 개전 이후 200만 명의 가자 주민 중 벌써 2만 명 이상 숨지고 6만 명 가까이 다쳤다. 어린이와 여성도 다수 포함됐다. 심지어 남부의 난민캠프까지 공습을 받아 아비규환의 참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들은 전기와 에너지·의약품이 끊긴 상황에서 공습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추위와 식량·물 부족에 고통 받고 있다. 감염병이 퍼지고 오염된 물로 인해 복통 환자도 늘고 있다. 가자 주민 입장에서는 외부와 차단된 채 토끼몰이 식으로 당하는 형국이다.
물론 이스라엘도 하마스의 기습 공격 당시 1,200명이 숨지고 200명이 인질로 잡혀가는 피해를 입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매일 현지의 참상을 접하면서 만약 예수가 이 사태를 본다면 어떠실까 상상해본다. 우선 예수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현재 고통 받는 이들과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는 양부를 따라 목수 일을 하다가 구약성경을 읽으며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서른 살에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뒤 많은 기적을 행한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오병이어로 5,000여 명을 먹이고, 물 위를 걷고, 중풍 환자를 고치고, 정신병을 낫게 하고, 소경을 눈뜨게 하는 다양한 일화가 신약성경에 나온다. 만약 예수가 지금 이 땅에 온다면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져주실 것이라는 얘기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이들아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라’고 했다. 메시아를 자처한 것이다. 그는 모두가 존중받고 구원받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유대교의 안식일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성전이 필요 없다고 했다. 당연히 로마 압제자는 물론 그들과 협력하던 유대인 사제 등 기득권층에 눈엣가시였다. 결국 정치·사상범으로 몰려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참혹하게 숨진 뒤 사흘 만에 부활해 승천했다고 성경에 쓰여 있다.
이렇게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300여 년간 이뤄진 극심한 박해를 뚫고 세를 넓히며 313년 종교의 자유를 얻은 뒤 380년에는 아예 국교로 거듭난다. 로마제국의 정신세계를 접수한 것이다. 이후에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불이익을 받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16세기 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악독하게 표현한 게 한 예다. 20세기에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까지 발생했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여러 차례 이슬람권과 전쟁을 치르며 지금은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가자지구를 철조망으로 둘러싸 사실상 감옥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강하게 억압할수록 분노와 보복 의지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 마련이다. 팔레스타인 온건 자치정부의 서안지구에 비해 강경파인 하마스가 통치해온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불붙은 게 예다. 결국 강대강 대결만으로는 근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채찍뿐 아니라 당근책까지 병행해야 한다.
세계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못지않은 화약고로 취급되는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새해에는 단연 튼튼하고 강한 안보를 바탕으로 평화의 손길을 내밀며 남북 관계를 주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상호 체제 인정과 불가침, 교류·협력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도 1992년 보수 정부에서 이뤄졌다.
“예수님은 힘의 과시를 통해 위에서부터 불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아래서부터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불의를 없애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탄 미사가 가슴을 울린다.
<고광본 서울경제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