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없이 지내는 백 시인은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종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박인애 씨 처음 문학회 왔을 때, 영락없이 밥하다 뛰어나온 아줌마 같았는데 많이 컸다.”라고. 여러 번 들어서 새로울 일도 없고,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라 기분 나쁠 일도 없다. 나 자신도 기억 못 하는 내 모습이 그에겐 꽤 선명한 모양이었다.
17년 전 내 모습은 어땠을까? 올해 21살 된 딸아이가 4살 때였으니 지금보단 젊었을 테고, 워킹맘이었으니 그렇게 추레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급 궁금증이 발동했다. 왜 여태 사진 찾아볼 생각을 못 했을까. 책장에서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아이 앨범을 꺼냈다. 지금이야 컴퓨터나 클라우드에 사진을 저장하지만, 그때만 해도 인화해서 앨범에 끼웠다. 사진첩을 넘기다 신데렐라와 여러 공주가 장식된 케이크에 초 4개가 꽂힌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그가 강조했던 밥하다 뛰어나온 아줌마를!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웃었다. 혼자 있었기 망정이지 누가 봤다면 미친‘ㄴ’인줄 알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눈물까지 훔쳐내며 할할 웃었다. 그리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빠글 파마와 아이를 낳았음에도 꺼지지 않던 배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긴 생머리만 고집하던 내가 “손님은 얼굴이 귀여워서 짧은 머리를 하면 더 어려 보일…”이라는 긴 설명 중에서 ‘어릴’이란 말에 꽂혀 앞머리를 싹둑 자르고 단발머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찌나 촌스럽던지 영락없이 딸이 매일 보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DORA’같았다. 다시 붙여달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도라~버릴 것 같았다. 한동안 거울 보기가 싫었다. 실력은 없고 입으로 한 머리 하시는 미용사에게 머리를 덜컥 맡긴 내 잘못이 컸고, 연하의 남자와 사는 여자의 비애였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어깨에 닿을 무렵 “요즘 디지털 파마가 유행인데, 자연스러운 웨이브라 여성스럽다. 묶어도 예쁘고 풀어도 예쁘다”라는 말에 또 넘어가 빠~마를 말고 말았던 거~시~었~따. 그 비싼 스트레이트파마로 갈아탈 때까지 부해진 사자머리 쥐어뜯으며 후회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하필 그 흑역사 중심에 그가 있었다. 앞으로 백 시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이전보다 더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2006년, 내가 사는 지역에 한인문학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우연찮은 기회에 그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지인도 아닌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였다. 미국에 한국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반가워서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정기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다. 같은 결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았다. 성실이 돋보였는지 2년 후 부회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 회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지난 17년 동안 나를 부르는 호칭이 여러 번 바뀌었다. 회장, 부회장, 총무, 회계, 편집위원, 편집국장, 고문 등이다. 어떤 자리가 빵구 나든 땜빵 가능한 인재가 되었다. 백 시인이 많이 컸다고 한 건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회장 하다 내려와 자존심도 없이 따까리나 한다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전해 들었으나 무시했다. 내게 직책은 봉사하는 자리일 뿐 벼슬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자리 잡아 차기 회장도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봉사하신다.
요즘 단체마다 회장 이·취임식이 많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회 회장 임기를 마쳤다. 전직 회장은 고문으로 예우한다는 회칙에 따라 고문이 되었다. 건강이 안 좋으니 빵구 난 자리가 나를 고문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제 숨통이 트이나 했는데, 이북오도민회 회장이 되었다. 거절 못 하는 병에 걸려 수락하였다. 중증이다. 전생에 무수리였던 게 틀림없다. 나는 지극히 약하고 부족하나 내가 필요하여 앉혔다면 감당할 힘도 주시겠지. 그분 백을 믿고 힘을 내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믿으며 청사진을 그려본다.
<박인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