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애틀랜타 거주)
그리스인 조르바와 자유. 크레타 출신의 작가인 닛코 카잔차키스가 1946년에 완성한 책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그를 세계적 문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은 아테네에 살고 있으며 친구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책만 읽는 “책 벌레”라고 불리우던 화자가 그 오명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관념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는 시점으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하는 지식인이 안고 가야하는 얄팍하고 주위의 눈치에 민감한 사치스러운 번뇌의 꺼풀을 훌훌 벗어버리고 흙 냄새를 맡으며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리움이 뇌리에 가득한 화자. 그는 크레타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갈탄 탄광에서 노동을 하며 육체의 고달픔을 체험하기로 결심하고 탄광을 계약해서 떠나기 위해서 아테네의 피레프스 항구의 카페에 앉아 폭풍이 잦을 때까지 샐비어 술을 한잔하며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키가 유난히 크고 골격이 탄탄하며 눈매가 심상치 않은 사나이가 화자에게 접근한다. 그의 이름은 조르바. 그런데 그는 일생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뱃사람 신바드” 한 권 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든 타고난 재능 덕택으로 능률적으로 일을 잘하는 달인으로 라키 술을 무척 즐기며 이 나라의 과부집은 모두 나의 침실이라고 하면서 여색을 즐기고 또 산투르 라는 악기를 치면서 그날 그날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랑인이다.
그는 화자에게 다가가서 크레타 섬에서 갈탄광산을 운영할 것이라는 걸 알고 나는 탄광에서도 일을 해봤으며 세상에서 안 해본 일이 없는 팔방미인으로 요리도 잘하고 당신의 충실한 하인이 될테니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화자는 그가 다분히 도발적이지만 어딘지 믿음직스럽게 보여서 쉽게 승낙을 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마치 바늘과 실과 같이 엮여 나간다. 그런데 조르바는 화자에게 일을 시작하게 전에 단 한가지 확답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명히 말해 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란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라고 화자가 물었더니 그는 산투르를 연주하기 위해서 처자식 마저도 버리고 떠났다고 말한다. 그는 산투르를 치면서 마치 장자가 소요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생은 잘 놀다 가는 것” 이라는 인생철학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곧 자유의 고귀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갈탄 탄광은 갱도가 무너져버리고 대체사업으로 벌목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조르바의 충고를 듣고 시작했으나 그 마저도 예상치 못했던 사고로 결국 갖고 있던 돈을 몽땅 날리고 두 사람은 헤어져서 각자의 운명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서 갈탄광산을 하는 동안 동네의 수도원에서의 비극적인 살인사건, 그리고 동네에 사는 미미코라는 청년이 소멜리나라는 미녀 과부를 짝사랑하다 자신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또 그 자살의 책임을 물어서 과부가 동네 사람들에 의해서 공개 처형되는 반전이 일어나곤 한다. 그런데 화자는 일생동안 종이와 먹물에 파묻혀 살며 대중으로부터 격리된 고독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무식하지만 조르바와 같이 머리 굴리지 않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나고 살던 시기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서 독립전쟁이 일어나던 정치적인 격동기로 그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3차례의 투쟁을 하겠노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는데 첫째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크레타의 독립, 둘째는 제도적인 종교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들이 섬기는 우상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위 세가지는 결국 자유와 해방으로 집약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의 눈에 보이는 조르바는 곧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자유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훗날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스승은 조르바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 때 불교에 심취되어 수많은 불경을 읽고 또 몸소 수행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붓다 라는 소설을 완성하고 해탈의 경험을 했다고 한다. 책의 요소요소에 붓다의 말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붓다를 영원한 구원의 문이라고 선언했다. 아마도 불교는 어떤 종교적인 도그마로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종교이기에 자유라는 개념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해탈이란 곧 어느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완전한 해방(libera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의스 묘비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완전한 자유를 찾은 해방된 카잔차키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