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는 왜 사랑에 실패했을까.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왕자에게 사랑 고백도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도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물거품으로 사라졌다는 슬픈 동화다. 말이 누군가의 운명까지 어떻게 좌우하는지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표현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릴 거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도 말하기 덕이었다지. 유발 하라리가 저서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을 ‘뒷담화’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집단의 결속과 협력 과정에 뒷담화를 필수 요건으로 삼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언어라는 추상적 사고 영역을 개발함으로써 살아남았고, 신체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고 포식자가 되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인간의 최대 무기는 바로 언어인 것이다.
‘말하기’ 하면 바벨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들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들이 협력해서 탑을 높이 쌓자 신은 탑을 못 쌓게 할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바로 더 이상 협력을 못 하도록 말을 흩트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인간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서 결국 성 쌓기를 멈췄고, 그래서 지금의 다양한 언어가 생겨났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언어의 발달은 사회성의 발달을 초래한다. 언어라는 도구가 있어야 관계 맺기가 가능한 것이다. ‘던바의 수’라고 알려진 개념에서 인류학자 던바는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최대 관계 수를 150개라고 했는데,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인간이 협력하고 통솔 가능한 최대 수 역시 150 정도라고 한다. 마을의 평균 인구 단위도 그렇고, 로마 시대의 보병부대부터 1개 중대의 규모에까지. 자신의 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가 당신의 관계 지능을 잘 보여주는 데이터일 것이다.
‘말하기’하면 이런 안타까운 에피소드도 떠오른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연설이 끝나고 주최국인 한국의 기자에게 질문하라고 한 적이 있다. 질문권을 받은 한국 기자들이 당황한 탓인지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흐르자, 오바마는 ‘혹시 영어를 못해서 그런 거라면 통역이 준비돼있다’라는 친절한 말까지 덧붙인다. 그래도 계속 질문이 없자 한 중국 기자가 일어나 같은 동양권이니 한국기자 대신 질문해도 되겠냐며 나서는 촌극까지 벌어지고, 결국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 넘어갔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얼굴이 화끈 달아오는 장면이다. 왜 똑똑한 우리 기자들은 질문을 안 했을까.
실제로 별로 할 얘기가 없었거나, 회견 시간이 너무 길어 그만 마쳤으면 하는 단순한 생각이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주저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질문에 인색하고, 우리 역시 잘 질문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동양적 정서에서 질문이란 어쩌면 거역이나 대듦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며, 산업사회를 거치며 질문이란 종종 공동체의 결속과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지지는 않았을까.
질문을 한다는 건 자신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비판적 사고력을 갖춰야 가능하다. 4차 산업혁명시대 미래인재에게 필요한 핵심역량으로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 외에 의사소통 역량과 협력적 소통역량을 꼽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생각하는 똑똑한 기계에게 밀리지 않는 인간을 지키기 위한 것이렸다. 1년 동안 챗GPT가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가. 그러나 그 똑똑한 챗GPT도 인간이 던지는 질문이 똑똑하지 않다면 종종 한심한 바보가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 속담에도 말로 뺨을 맞을 수도 있고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때, 혹시 내가 누군가를 말로 때리지는 않았는지 한번들 돌아보자. 다정한 말 한마디가 절실히 그리운 추운 시절, 말 한마디가 따뜻한 연탄이 되어 나도 뜨거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성공의 90%는 인간관계가 좌우한다. 인간관계의 90%는 말이 좌우한다. 말해야 산다! 잘 말해야 잘 산다!
<김관숙 선거연수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