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교회 마당의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토실하게 여문 상수리를 아낌없이 떨구고 신록에서 진초록으로 이제는 갈빛이 된 잎을 부지런히 내린다. 내려놓음과 비움이다.
가을나무만큼 내려놓음과 비움의 이치를 여실히 가르쳐주는 스승이 또 있을까? 불가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있다. 버림이요 떠남이다. 이 가을에 나는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비우고 버릴까? 가을나무처럼 잎이 있다면 단 한 잎이라도 좋으니 탐욕의 잎새를 사뿐히 내려놓고 싶다.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욕심이나 탐욕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삶을 힘들고 무겁게 한다. 욕심과 욕망이 전혀 없을 수 없으나 지나친 욕망 곧 탐욕은 경계해야 한다.
탐욕은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도리를 벗어나거나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다. 탐욕은 밑 없는 항아리다. 탐욕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히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탐욕은 개인의 내면과 삶을 고통스럽고 무겁게 한다. 탐욕은 또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세상을 혼탁하게 한다. 과소비, 넘치는 음식물 쓰레기, 과도한 에너지사용, 부동산 투기, 경제적 양극화 등 모두 인간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쟁도 국가적 탐욕에서 시작된다. 인류와 지구의 평화 그리고 미래세대의 내일을 위협하는 기후재앙도 탐욕의 결과이다. 지금 세상은 탐욕의 시대다.
욕망을 따라 사는 탐욕의 시대에, 다르게 살아야 한다. 탐욕이 빚어내는 무간지옥과 피비린내에서 벗어나 흙냄새, 꽃향내, 사람냄새 맡으며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홀가분한 삶이란 탐욕에서 벗어나는 삶이다. 홀가분한 삶이란 욕구와 욕망의 집인 몸을 입고 살기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무욕의 추구도 아니요, 채움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탐욕의 채움도 아니요, 그저 탐욕에서 벗어나는 삶 곧 해욕(解慾)이다.
해욕은 마음에 무엇을 더 채우려는 욕망이나, 결핍감이 없을 때의 상태를 말한다. 탐욕에서 해방된 마음이 해욕이다. 해욕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안분지족의 삶을 말한다. 노자는 이런 마음을, 족함을 아는 지족(知足), 멈출 줄 아는 지지(知止)의 마음이라 했다.
해욕으로 경험하게 되는 홀가분한 삶이란 그 실천이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 삶에 꾸밈이나 치장을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욕심을 줄여가는 일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를 소사과욕(少私寡慾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라)이라 말한다. 욕망을 부정하는 무욕(無慾)이 아니라 자기의 필요를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는 과욕(寡慾)이다. 매사에 끊임없이 자기를 위한 욕심을 적게 하고 줄이는 소사과욕의 실천이 홀가분한 삶이다.
홀가분한 삶은 또한 소유가 아닌 존재와 존재 실현의 삶에서 행복을 얻는 삶이다.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존재를 실현하며 사는 삶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신 ‘하늘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핀 꽃을 보며’ 사는 삶이다. 자연의 베풂과 아름다움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다.
정채봉 시인은 <오늘>이라는 시에서 이러한 삶을 이렇게 노래한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시인의 마음이 가볍고 맑아 배부르다. 홀가분하다. 어디 탐욕이 있는가, 탐욕에서 벗어난 해욕의 삶을 보여준다. 이 가을, 남김없이 내려놓고 비우는 가을나무를 스승 삼아, 탐욕에서 벗어나 홀가분히 해욕의 삶을 살고 싶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