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적인 충격이었다. 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끌었던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격동의 80년대에 썼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다음은 인상 깊었던 3가지 대목이다.
공산당 간부 시절 지방 시찰 중이었는데 트럭에서 감자가 떨어지고 있는데도 계속 가길래 세워놓고 운전사에게 물었더니 ‘나의 임무는 이 감자 박스를 30분 내에 A에서 B 지점으로 수송하는 것입니다.’
또 못 생산공장에 들러서 보니 보통은 사용하지 못할 큰 못 두세 가지 종류만을 만들고 있어서 관리자에게 물어봤다. ‘나는 하루에 3톤의 못을 생산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시베리아 철도 노선을 자세히 보면 허허벌판에 똑바로 곧은 철로가 어느 지역에서 갑자기 반원형으로 빙 돌아가는 부분이 있어서 그 내막을 알아본 결과 ‘설계자가 자를 대고 설계도를 그리다가 한 손가락이 잣대와 물려서 내민 부분을 그대로 볼록 나오게 그린 걸 설계도만 보고 철로를 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고르비는 이런 비효율, 비능률, 무책임, 영혼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체제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1985년 서기장에 선출되자마자 세기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잊어버릴만하면 미국의 빈곤층에 대한 조사가 발표되곤 한다. 고 뱅킹 레이트가 최근 미국인 1,1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36%가 ‘집에 100달러의 현금도 없다’라고 답했다. 또 67%의 미국인들이 500달러의 현금도 없다고 답했다. 만약 1,000달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80%를 상회할 듯하다.
또한 작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가 크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전쟁도 없는 미국에서 매일 120명씩, 연간 4만5,000만여 명이 총기로 사망하고 있는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하다.
자본주의는 무결점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끊임없이 보완하고 견제하지 않아서 생긴 빈부 양극화는 이미 예견되었고 부지부식 간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각국의 국가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보완, 개선해 나갈 것인가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 추구에만 천착해 보인다.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은 여당의원 연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다.’ 좀 엉뚱하구나 했다. 40년 전 소련 붕괴 이전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요즈음에는 개인 간에도 ‘빨갱이’어쩌고 했다가는 주위가 조용해져버린다. 그런 것은 이미 이 세상에는 거의 없다. 요즘 세상에 누군가 이념을 이야기하면 마치 씨앗 뿌린다면서 시멘트 바닥을 파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국내 초중고 교과서에 그분의 글들이 가장 많이 실려있는 최재천 전 서울대 교수는 2023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평생토록 관찰해온 자연에도 서로 손잡지 않고 생존하는 생물은 없다”면서 만약 여러분이 나가서 공정하지 못하면 바깥세상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혹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는가, “나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돼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내것은 내가 먹고 니것은 네가 먹는 딱 그런 이념이 아닌,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그런 이념이 아닌, 더불어 같이 잘 살자는 말이나 노력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열심히 계속 콘크리트 바닥을 파라.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뭔가 하고 들여다보기는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강창구/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