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시인 윤동주는 “참회록(懺悔錄)”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시인의 고백은 인내하며 인생을 기다림으로 살아왔던 흔적이 역력합니다.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의 짧았던 세월이라 하지만 그 긴 세월을 묵묵히 삶의 궤적(軌跡)을 한 줄의 참회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삶의 의무감 그것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 양심의 소리요, 기도 그 자체입니다. 시인 다윗은 윤동주와 같은 맥락의 신앙고백을 기도로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편 40편 1절) 하나님의 시인들 다윗과 윤동주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간의 기다림을 기도라는 채널을 통하여 오랜 숙원의 간구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양심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다림은 양심이 그 전제가 될 때 비로소 인내의 참 가치가 그 효력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거룩한 신앙양심이 소멸된 기도는 결코 “기다리고 기다렸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울러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의 고백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놓고 고백합니다. “내가 왔나이다!”(시편 40편 7절) 시인 윤동주의 위대함은 양심선언입니다. 현하, 오늘을 살아가는 21세기의 현대인의 마음속에 양심이 실종(失踪)된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시인의 모습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셔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나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양심의 기도, 양심의 인내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에게 소망과 확신의 보상으로 선물하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참회록”을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이란 긴 세월을 단 한 줄”로 양심의 소리로 고백기도를 할 수 있으며, 시인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왔나이다!”라는 나의 양심고백을 단호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다림과 사람의 기다림의 공통분모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살아있는 양심으로 인내하며 소망하며 확신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그 기다림 가운데 임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