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홀(William J, Hall)과 그의 부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여사는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갔다가 서울에서 1893년에 결혼하여 그 이듬해에 평양으로 가 선교한 의사부부이다.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볼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의사였던 스크랜튼의 요청으로 미 감리교 여선교부는 1890년 이들을 한국에 보내게 된 것이다.
그 후 그들은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던 평양에서 사역하도록 보내지게 되었다. 그 당시 상황은 통역자와 그들에게 집을 판 사람들까지도 관아에 붙들려가 죽도록 매질 당하였던 시대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윌리엄 홀은 노블 선교사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하나의 생명을 희생하여 이 도시를 개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생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If it is God’s will to open up this city by the sacrifice of one life, I am not unwilling to be that one.)”
결국 그는 1894년 청일전쟁 때 평양 인근에 있던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혔다. 홀로된 로제타 홀 여사는 그 이후 어린 딸을 또한 평양에서 잃게 된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녀는 선교사역을 포기할 정도로 완전히 희망을 잃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주위의 도움으로 다시 용기를 얻어 남편과 딸이 묻힌 한국을 다시 찾게 되고 1899년 맹인들을 위한 점자교육을 실시하고 1928년에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를 설립하여 최초로 한국에서 여의사들을 길러내는 등 의료선교사로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한국과 인도에서 의료선교사로 헌신하며 한국에서 결핵요양원을 처음 설립하고 크리스마스 실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다하고 선교사로서 머나먼 한국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게 된 것이다.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치며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바보의사‘라고 불리며 살아온 고 장기려 박사는 “나는 의학도가 되려고 지원할 때 치료비가 없어서 의사의 진찰을 받지 못하고 죽는 환자들을 위하여 의사 일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부산모임 1980년 4월호)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순간의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지 모른다. 인생이란 마치 올림픽 선수가 경기에 한 번 출전하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인생이란 음악인이 한 순간의 연주회를 위해 수많은 시간을 연습하는 것과 같다. 인생이란 십자가를 앞에 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기의 전 재산인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사는 것과 같다. 가장 고귀한 일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전체를 한 순간에 깨뜨리는 것이다. 그 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는 것이다.
<장재웅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