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시월로 접어들었다. 시월의 숲은 무성했던 우거짐을 내려놓으며 초록은 뉘엿뉘엿 빛 바램으로 접어들고 있다. 초록 발육이 한계점에 이르렀지만 푸름의 향훈이 아직은 머물렀고 여름의 무르익음이 지친 채 고여있는 경쾌한 계절 길목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코발트 빛으로 높아가고 바람도 아름드리 고목이며 하늘 우러른 까마득한 나무 사이로 조신해야 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한바탕 허물없이 휘감기며 불어댄다. 막힌 데 없는 바람 길이 개운하고 후련하게 마음을 트이게 해준다. 인생들의 생각대로 바람 흐름을 한치라도 지연할 수 있었냐고 질문을 던져대는 바람 흐름새가 서늘하고 상쾌하다. 인적 드문 숲이라 싱그럽게 뻗어있는 수목에 압도 당하는 느낌은 모처럼 안아보는 안도감 같기도 하고 오묘한 성취감 같기도 하다. 숲 내음, 산 내음에 바람 흐름까지 그윽한 충만이다. 서둘러 단풍으로 물든 잎새들이 언뜻언뜻 시야에 들어온다. 잘 보존된 원시림의 위용 앞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 바로 숲의 매혹이요 대범의 여백이다.
눈부신 햇살이 시월 숲에 드리워지고 숲은 곧장 다음 계절로 갈아입어버릴 모양새다. 산 기슭을 흐르는 물소리에도 생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숲 그늘이 짙어도 시월이 돌아오면 이내 푸른 잎맥 실핏줄의 퇴색이 두드러지 듯 돋보임이 애잔하다. 찬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엽록소의 소진을 예감하게 되나 보다. 엽록소로 불리우는 잎 파랑이는 식물에 함유된 녹색 색소로 광합성의 핵심분자인 빛 에너지를 흡수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는 색소를 칭 함인데,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로 하여 햇살 에너지가 줄어듦으로 하여 초록 엽록소도 기능을 잃어가게 된다. 시월이 계절의 길목에서 가늠자를 들이대고 있음에도 아직은 푸름의 특권인양 초목은 제 키를 자랑하고 덩달아 새들의 노랫소리로 하여 숲은 평온에 젖어있다. 숲에서 듣게 되는 새들의 합창은 언제 들어도 평화롭고 바람도 숲도 평안 하기 그지없다. 깊은 심호흡이 토해진다. 시월의 숲에 잠겨 있노라면 세상으로부터 받는 자극의 무질서나 혼란이 잠재워지고, 아픔도 외로움도 초록 푸름 속에서 정화된다. 질서와 조화가 아우러진 넉넉한 기쁨과 안녕으로 채워진다.
나무와 나무가 어우러지면서 숲을 이루었기에 홀로 서 있는 나무에도 눈길이 머물지만 어우러져 이룬 숲은 서로를 너그럽게 감싸며 밀어내지 않는 용납으로 숲을 조성해낸 밀집성의 따뜻함을 칭송하며 따르고 싶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린 바람 결에도 바람 맞는 모습이 어찌 보면 애절함으로 뒤흔드는 모습이라 무참한 바람 결에 술렁이는 숲의 술회가 맑고 애잔하게 와 닿기도 한다. 숲은 언제나 이듯 하늘을 우러르면서도 우주를 포옹하는 대범을 보여준다. 이슬로 목을 축이고 천둥번개 폭풍에도 겸허로 내린 뿌리는 대지 품을 파고들며 결코 만용을 부리거나 시샘 하지 않는다. 계절 환승 무렵이라 사람 틈에서 유난히 외로움이 밀려들면 숲을 찾게 된다. 가지를 뻗으며 서로를 포용 하려는 몸짓으로 바람이 일면 서로를 비벼대며 외로움을 삭이고 있는 숲과 동병상련을 나눌 수 있어 금상첨화다. 숲의 순환은 우리네 인생 여정을 침착하게 보여 주고 있다.
숲을 이룬 나무의 생장을 뒷받침해온 광합성 작용은 이산화 탄소를 소비하고 산소를 내놓는다. 물질만능 현대사회 속에서의 광합성 작용이야말로 세상의 호흡창구라고 생각 된다. 숲의 생존을 본 받은 존경받을 만한 인성을 지닌 지성의 모습이 점점 드물어지고 희귀해지는 세상으로 가고있다. 혼탁해져 가는 세상살이에서 맑은 공기로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해주는,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양심의 건강한 폐활량 같은 존재로 생각된다. 숲이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맑고 신선한 공기를 내어주듯이 지성은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양심의 창이 되어주기에 지성의 외침이 절실한 시대이다. 빌딩 군집과 매연으로 가득한 도심이 삭막하기 이를 데 없음 같이 지성의 대성 질호 호통이 사라져 가는 세상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사해 같은 세상이 도래할 수 밖에 없음이다.
세상이 분출해내는 어지러움과 불편, 일상의 조화가 깨어지는 것에 까지도 삶의 광합성 작용이 절실한 시점이다. 일그러진 세상 풍조를 잠재울 수 있는 발상을 외면한 채 앞만 주시하며 질주할 수 밖에 없는 일상들이지만 잠깐이라도 도심을 떠나, 사람을 떠나, 일을 잊고, 관계를 잊고 대자연의 충만한 아름다움에 몸과 마음을 맡겨볼 수 있는 길이 이렇듯 열려 있는 것을. 푸른 하늘, 울창한 나무와 숲, 방만한 바람의 난무에 어우러지며 느껴보고 노래할 수 있는 숲이 얼마든지 가까운 공원들이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터인데. 각박한 삶을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받을 수 있는 자연과의 대화를 마냥 억제하는 마음들을 어이해야 할까 싶다. 숲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보답할 길을 찾기로 기약하며 아쉬움으로 숲을 떠난다.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시월 숲이 쏟아놓는 수다의 미로 속을 걷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을 듯하다. 숲의 과묵한 다변이 마냥 경쾌한 시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