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1985년 11월 나는 첫 목회지인 자라도 교회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부임한 후, 어느 주일 저녁이었다. 나는 “성령과 우리의 상처난 감정들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분야에 관 설교는 처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설교 내용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감히 그러한 설교를 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날 저녁 설교한 내용인, 과거에 받은 상처들의 치료와 손상된 감정의 치료는 지금에 와서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그 때만 해도 그러한 주제를 다룬 많은 책들이 나와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내가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섰을 때 나의 시선은 회중 가운데 앉아있는 연로하신 분들에게로만 자꾸 가는 것이었다. 자라도 교회를 첫 목회지로 가기로 결정을 했을 때 아내와 나의 마음 속에는 몇몇 남아 교회를 묵묵히 지켜온 어른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 어른들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과연 그곳에 가서 사역을 잘 할 수 있을까?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부임 후 어느 날 저녁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이며 나는 그 메시지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예배가 끝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강단에서 아주 놀라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나 역시도 강단에서 내려와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도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졌는데 마음 속으로 빨리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랬을 때, 한 형제님이 나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다. 강단 한쪽 모퉁이에 앉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는데 나는 마치 모세가 시내산의 불과 연기 앞에 섰던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목사님. 오늘 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의 아픈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군요? 나는 그 때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속에는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있구나. 설교란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하는 것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앞으로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더 깊은 차원에서 경험하고 성령님의 고치심과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극서쪽 지방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삼나무와 적색 삼나무들을 보게 된다. 우리가 그 곳을 방문하게 되면 대부분의 공원에서는 식물학자들이 큰 나무를 잘라낸 절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해마다 나무가 성장한 기록을 나타내 주는 나이테를 다음과 같이 가리킨다. “여기에 나타난 이 테는 아주 가물었을 때를 나타내는 것이고. 여기에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 때를 가리키고, 여기에는 천둥 번개를 맞아서 그렇구.”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이 나무가 어떻게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면을 쓴 것 처럼 잘 감추어진 우리의 외적 모습 내면에 인생의 나이테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오래된 아픈 상처가 남아 있고 여기에는 기쁘고 감사하고 좋은 날의 표시도 있다.
한 어린 소년은 어떤 크리스마스 새벽에 자기의 선물을 넣는 양말 속에 선물 대신 더러운 돌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소년은 그것이 그가 잘못한 것에 대한 벌로써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처가 그 어린 소년의 인생 전체를 짓밟아버린 비극적인 자국으로 남아 있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상처의 자국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육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 속에서도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주님 앞에 가면 다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다음에 주님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좋은 것만 남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상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