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받으신 박해는 사람들의 폭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 유행하던 잘못된 사상으로 교묘하게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편견으로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논쟁에 대해서 아주 훌륭하게 답변하셨다는 소식이 바리새인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말씀을 책잡을까 생각하다가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공개적인 답변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듣는 것이기에 자기의 종교적인 발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율법사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토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유대인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싶었습니다. 율법사는 “계명 중 어느 계명이 큽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수준에 맞지도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율법의 개념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도 희랍어에서도 “율법”이라는 말은 단수입니다. 그 율법 속에 많은 계명들이 들어 있지만 계명이 하나씩 따로 존재할 수 없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계명들 전체를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율법을 베끼는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격한 습관도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베끼다가 일정 수 이상 틀린 곳이 반복되면 그 귀한 양피지를 찢어 불태워 버렸습니다. 거룩한 율법이 잘못 필사된 채로 존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고 율법 안에 계명들이 있는데 어떤 것을 빼거나 더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밑줄 쳐 두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율법사의 태도 자체가 대단히 무식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 율법사는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겠습니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묻는 질문에는 큰 계명과 대조되는 작은 계명이 있어서 큰 계명은 열심히 지켜야 되고 작은 계명은 하잖게 생각해도 좋다는 듯한 당시의 편의적인 신앙관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계명이 있고 작은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큰 것은 중요하게 지키고 작은 것은 하잖게 여겨도 됩니까? 그렇다면 가장 커다란 계명은 어떤 것들입니까? 십계명만 크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작은 것들입니까? 세상의 법정에까지 서야 하는 죄는 매우 큰 것이고 교회 안에서만 인정되는 법죄는 사소한 것들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어떤 계명들은 꼭 지켜야 하고 어떤 계명들은 덜 지켜도 좋다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서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이 무었인가 생각하고 그것을 세심하게 나누어 큰 계명을 지켰을 때에는 안도의 숨을 쉬고 작은 계명 정도를 어겼을 때는 가책을 받지 않는 일들은 개인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