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연구의 선구자 제임스 맥고 박사는 어느 날 AJ 라는 젊은 여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선생님, 모든 게 너무 자세히 기억나서 미칠 것 같아요. 10년 전, 20년 전, 어느 날짜라도 제게 물어보세요. 뭐든 다 기억할 수 있어요.” 그녀는 실제로 그날그날 일어난 세세한 지역 뉴스부터 날씨, 어느 극장에서 어떤 영화가 몇 시에 상영되었으며 주인공은 무슨 색의 옷을 입었는지 일일이 기억했다. 처음엔 장난 정도로 여겼던 맥고 박사는 AJ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자 곧바로 정신과의사, 뇌과학자와 더불어 연구팀을 구성한다. 이것이 ‘과잉기억증후군’ 탐색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잘 기억하고 싶어 하는 줄 알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9.11과 같이 트라우마로 남을 재난, 첫사랑 연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던 그날의 쓰린 기억, 끔찍한 자동차 사고현장, 사랑하던 가족이 세상 떠나던 날의 마지막 힘겨운 호흡, 회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기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괴로움이나 공포를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고통스런 기억들이 세월 가면 잊어진다는 망각 이론에 의지해왔다. 마치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이 세월 따라 빛이 절로 바래듯.
최근 인지심리학자들은 망각이란 저절로 일어나는 수동적 현상이 아니라 뇌의 능동적 활동의 결과라는 새로운 이론에 집중한다. 뇌의 망각 기능을 활성화하면 PTSD, 불안, 알츠하이머 등에 더 나은 치료법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존 뮤어 트레일을 걷던 하이커들이 갑자기 나타난 곰의 모습을 AJ처럼 낱낱이 기억한다면 어떻게 될까? 곤두선 털과, 발톱의 구부러진 각도, 곰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든 저물녘 태양의 각도 등을 죄다 기억한다면? 그 다음엔 곰으로부터 공격당하지 않을 어떤 레슨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 것이다. 불필요한 세부 기억보다는 핵심만 기억해야 미래 새로운 상황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기억’만큼 ‘망각’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망각이 없으면 기억도 없다. 하버드 연구팀도 초파리, 생쥐 등을 이용한 기억실험에서 알츠하이머란 기억 작용 고장이 아니라 망각 작용의 고장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2013). 망각의 지나친 활성화가 치매증상을 부추긴다는 것. 위에서 어떤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물건이 가시 돋친 선인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뻗었던 손을 다시 들여올 것이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다는 기억 때문에 사람이 원치 않는 경험 앞에서 손 뻗는 행동을 멈추듯, 원치 않는 기억이 떠오르면 자발적으로 기억 인출을 억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즉, ‘기억하기’ 대신 ‘망각하기’를 활성화하면 머릿속에서 나쁜 기억만 골라서 지우는 일이 가능해진다. 우울한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슬픈 기억을 계속 떠올리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되풀이 반복하는 것도 통제가 가능하다. 의학, 심리학, 뇌과학은 이렇게 PTSD 환자들의 고통스런 기억만 선택적으로 지우는 기술을 집중 연구 중이다. 세뇌로 악용될 윤리적 위험을 걱정하는 일부 시각에도 불구하고 망각 연구는 최근 심리학계의 핫한 주제이다. 세계적 재난 급의 기억뿐만이 아니다. 엑스(Ex)를 잊지 못해 잠 못 이루는 밤,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 지우듯 원치 않는 기억만 ‘클릭 클릭-->완전 삭제’로 갈 수 있다면 짧은 인생길, 아픈 세월도 후울쩍 단축되리라.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