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목사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의 지혜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우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있던 이 땅에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 보내셨습니까? 언약을 파기한 것은 인간들인데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미신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분께서 독생자의 몸과 살을 다 찢어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무슨 덕을 보시려고 하셨을까요? 그 사랑은 논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는 인간의 지혜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눈이 머셨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의 좁은 소견과 논리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감격할 이유입니다. 적합한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우리는 가끔 그러한 사랑의 그림자인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분만이 가지고 있는 이 사랑을 우리 부모들에게 주셨습니다.
향락적인 헬레니즘의 물결이 세상을 뒤덮을 때 로마가 타락했던 모습은 역사를 통해서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데 이 때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폼페이라는 도시가 통제로 화산재에 묻혀 버렸습니다. 이 도시의 유적을 발굴할 때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죽은 모습이 나왔습니다.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은 등과 머리에 그 어마 어마하게 무거운 벽돌을 짊어지고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면서도 아이를 품에 안고 죽은 것을 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듯 합니다. 어느 철학자는 생명을 정의 하면서 “생명이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원칙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톨스토이가 “사랑의 감정은 죽음의 공포보다 강하다. 헤엄치지 못하는 아버지가 물에 빠진 아들을 보고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사랑은 사랑하지 않을 때 불가능하던 것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 감당할 수 없던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지금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고 마음껏 신앙 생활하고 싶은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장애물이 눞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영혼들을 섬겨 오면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 부어진 여러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없이는 그 지체들의 얼굴을 떠 올릴 수 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