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로 옮겨온 지 두 달이 돼간다. 대륙을 건너 새로운 땅에 살기로 작정하면 그것은 새로 이민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말이 맞았다.
아직도 자동차에 캘리포니아 번호판을 바꾸지 못하고 다니는 걸 보면 정착하기까지 미진한 일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제쯤은 나도 피에르 쌍소가 말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터득하며 사소한 일들은 쉬엄쉬엄 챙겨가기로 했다.
자리 잡은 곳은 중부 뉴저지의 나지막한 산기슭, 브리지워터라는 타운쉽이다. 아파트 주변이 울창한 수풀이어서 여름인데도 공기가 청정하고 다리 건너편 시가지에는 2-4마일 이내에 마켓이며 음식점이며 백화점 등이 즐비하게 있어 자연환경과 편의시설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곳이다.
시가지의 반대편 방향인 산 속으로 들어가 잠시 미아가 된 기분으로 꼬불꼬불한 숲속 길을 따라 5마일을 올라가면 그 산등성이에 베스킹 리지라는 동네가 있다. 여기에 사는 딸네가 넓은 뜰의 한편에 제법 큰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이 텃밭이 나를 이곳으로 유혹한 것이나 다름없다.
본시 6, 7월이 제철인 상추, 고추, 깻잎, 오이, 가지, 호박 등의 야채가 동부지역 특유의 고온과 뜬금없이 쏟아 붓는 소나기 그리고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을 타고 얼마나 잘 자라 주는지-- 싱싱한 먹거리의 외곽으로는 맨드라미와 다알리아, 장미 등 형형색색의 화초부대가 울타리를 쳐주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으레 텃밭에 올라가고 싶어진다. 가서 밤새 자란 야채와 꽃들을 만나보고 그들과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쑥쑥 키가 큰 잡초를 뽑아낸 뒤 물을 흠뻑 뿌려주고 내려오는 일인데 해 뜨기 전의 흙과 풀이 가장 부드럽고 냄새가 좋다는 때문도 있으나 해가 뜨거워지는 시간을 피하려는 이유도 있다.
철저하게 변신한 ‘귀농인’이나 ‘자연인’과는 거리가 먼 ‘초보 농부’에 지나지 않지만 흙속에서 두어 시간 땀을 흘린 뒤 숲의 기운을 받으며 산길을 내려오는 마음은 이전에 누려보지 못한 행복이다. 산길에서 아기 사슴을 거느리고 유유자적 길을 건너가는 사슴이라도 만나면 마음은 더욱 평화로워진다.
땅만 있으면 거의 모두를 개발해버리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미국은 하와이와 알래스카 주를 제외한 48개주가 면적의 3분의 1을 숲으로 남겨놓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든 스테이트’라는 별명을 가진 뉴저지는 집만 나서면 도처에 대규모 공원이고 농장이고 정원이다.
그 숲을 가꾸는 일도 된다고 생각하며 텃밭의 잡초들을 사정없이 뽑아낸다. 그럴 때면 마치 후진국의 용병대장이라도 된 듯 우쭐함에 빠지다가 이내 부끄러움을 느낀다. 흙은 모든 생명을 가리지 않고 포용해주며 그 너그러움에 힘입은 무명의 잡초들마저 저토록 왕성하게 키워 주고 있는데….
흙과 수풀의 세상에서 광복절을 맞는다. 78년 전 우리 선현들은 왜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며 그 벅찬 감격의 시간에 흙을 만져보려 했을까. 무릇 어떤 권력이라도 흙이 주는 생명, 화합,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통합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