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내가 만나는 모든 슬픔을 재어보네”라는 시로 유명한 19세기의 대표적인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인생고뇌는 모든 인류의 고뇌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시인 다윗은 자신의 인생고뇌를 풀어놓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또한 영혼의 슬픔을 치유받을 수 있는 영적인 쉼터를 “쉴 만한 물가”라 표현하였습니다.
무엇이 에밀리 디킨슨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 한 가운데 “쉴 만한 물가”가 되어준다 말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몸을 찌르는 위로”를 견인(堅忍)하셔서 굳세게 참고 견뎌 내셨기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쉼>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늘의 영원한 쉼터”인 천국을 미리 보았을 때, “죽임을 당한 어린 양, 그리스도”에게서 선명한 <주님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이 상처는 자기 백성의 죄와 절망을 짊어짐으로 생긴 것이고 그로 인하여 <새 생명과 산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참 제자 베드로는 그의 맑은 영안으로 보았습니다(계 5:6, 12; 벧전 2:24~25).
“쉴 만한 물가”는 <전쟁> 속에서도, <홍수> 속에서도, 화염이 타오르는<불길> 속에서도, 기아와 빈곤으로 벽 같은 희망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 속에서, 심지어 그 어떤 순간에서도 능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쉴 만한 물가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참 사람>이면 가능합니다. <참 영혼>이면 가능합니다. 스스로 참 사람과 참 영혼이 되기를 갈망하며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야훼는 목자가 되어주실 뿐 아니라, 야훼 자신이 인류들에게 공개적인 사랑의 선포를 하십니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야훼의 말씀이니라”(에스겔 34:31). 지치고 무너진 영혼을 가진 이 시대의 모든사람들은 바로 지금, “쉴 만한 물가”로 나아가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아, 이 쉴 만한 물가에서 <회복>과 <치유>를 받습니다(시 23:3). 쉴 만한 물가는 그저 휴식과 안락만 제공하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휴양지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 쉴 만한 물가는 <야훼 하나님 자신>이며, <영원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이유만으로도 현하(現下), 우리는 쉴 만한 물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난 사람, 즉 참 사람이 되는 순간, 절망과 고독 속에서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쉴 만한 물가”가 되시는 야훼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참 사람 역시 “쉴 만한 물가”로 온전히 거듭나는 것입니다. 쉴 만한 물가의 신비를 체험하고 체득한 에밀리 디킨슨, 시인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마침내 쉴 만한 물가의 축복을 받은 증거는 시인의 입술에서 담대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표현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쉴 만한 물가는 <영혼의 쉼터>입니다. 쉴 만한 물가는 <영원히 살 야훼의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