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시간은 한 번도 흐름을 멈춘 적 없이 흘러가는데 누군가 만든 시간의 마디에 마지막 달 12월이 안착했다.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일 수 없는 12월이라서 가을이 밍기적거리며 동행하고 싶었나보다. 12월에까지 가을이 범람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만큼 우리 마을엔 아직도 고운 단풍이 다채로운 색감이 어우러지는 시각의 계절임을 뽐내고 있다.
12월이 들어서면 미진한 한해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길목이 되어주곤 했었기에 관례적 풍습처럼 가을이 12월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한 해를 건너온 여정을 원격으로 드론을 조정하듯 세세히 비추어보게 된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분주했는지. 원색의 빛을 다 드러내고 불태운 낙엽처럼 자의식이 담긴 온전한 빛깔의 삶을 빚어냈던가.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명분에 떠밀리느라 한 해라는 길위의 삶이 부끄럽진 않았는지. 스산함만 소롯히 남겨질 낙오된 12월의 가을 뒷모습이 혹여 잔상으로 남겨지는건 아닐런지. 가슴이 미어질만큼 나를, 가족을, 주변을 사랑했던가. 12월의 가을은 이미 송구영신을 준비하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누누이 의문부호만 거듭 창창히 떠오른다.
12월의 가을은 마치 못다한 고백이 고여있는 평화로운 호수 같다. 다망했던 한해를 찬찬히 돌아보게 해준다. 치열했던 시간들을 내려놓으며 분주한 마음을 돌아보며 본연의 참된 모습을 찾기위한 사유의 폭을 넓히라 한다. 한 뼘도 못되는 12월 가을 끝자락이 유순하게 흘러가기를 바램해 보지만 세월은 아침 저녁 동장군을 불러들이는 모양새다. 12월과 동행한 가을 끝자락이 보이는 지금에사 잔잔한 묵언과 은근한 융숭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12월로 흘러든 가을은 부드럽고 어진 심성으로 관대한 선을 행하라는 타이름을 건네준다.
12월의 가을은 비워내고, 내려놓는 의지만 있는게 아니었다. 퇴색과 황홀함, 찬란함과 소멸의 상반된 가을 실체를 공손히 받들다보면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가을 언어가 침묵의 이랑을 고르며 한고랑 너머 두둑을 만들고 한고랑 넘어서며 이랑을 일구듯 시를 담아내고 시가 쌓이면 수필로 담아내라 한다. 계절의 침묵 너머로 한 없이 푸른 하늘을 우러를 때도, 한점 떠도는 구름에서도, 온통 초록이었던 천지를 더는 아름다울 수 없을 만큼 세상 고운 색조들을 불러들이는 궤도 진행의 진전 과정에서도, 비처럼 쏟아져내리는 가랑잎 난무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소박한 설레임이 이는 것에도, 그윽한 시의 언어를 구축해두기 위해 청빈하고 고결한 붓을 준비해두었어야 했는데. 모든게 아쉬운 가을날이다.
내려놓음과 비움이 소멸로 치닫는 두 가닥 실존 앞에서도 깊숙히 가을 속으로 심취되는 이끌림의 실체는 무엇일까. 무구한 순결로 인생들을 품어주기에 두 모습을 지녔다한들 외면할 수는 없음이다. 포만과 이룸의 절정이 응집된 벅찬 감정도 비합리적 고독과 고립, 쓸쓸함을 대변하듯 나락으로 스러지는 감정도 밀어내지 않으며 서로 다른 성정을 모순의 체험을 해야하는 것이 가을 미학이요 값어치다. 한결같은 느낌으로 인생들 곁으로 다가오려는 신선한 오기로 보이기도 한다. 냉혹한 한겨울이 코앞인 척박한 계절 길목에서 서성이면서도 당당한 듯 성실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계절로 보이고 싶어하는 애절함도 엿보게 된다. 이 마저도 12월의 가을이 가진 영원성이요 순종의 은유요 소용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땅덩이가 무섭도록 빠른 초고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보내고 계절은 들어서고 헤어지면서 한해를 보내곤한다. 끝모르는 우주 공간에서 은하계에 속하는 행성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행복을 찾아, 행복을 찾았노라고,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 갈피없는 변죽을 울리기도 하고 격세지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전화위복을 꿈꾸기도 하면서 새로운 균형을 꾀하며 끝없는 삶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오미크론 공포가 다시금 집콕을 작심해야하는 와중에 나라마다 삶의 양극화로 긴축과 기대가 교차하지만 오징어 게임이 세계 드라마 흐름을 주도하고 BTS 그룹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다’라는 메시지로 세계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은 쉼없는 책망과 비난으로 소란이 잠재워지질 않지만 12월의 가을은 달관과 태연자약으로 내려놓음을 발견해가기를 도모해 주었고, 비움의 미학 또한 인생들이 감지하기를 기다리느라 12월을 범람해버린 것일 게다. 12월의 가을이 떠나버린 빈 자리는 쓸쓸한 한기로 채워질 것이지만 다 내어주고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의 순리가 숭고한 울림으로 와 닿는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새로이 받아든 생명의 씨앗들은 12월의 가을이 오롯이 남기고 갈 자서전이 될 것이다. 12월의 가을이 작별의 손을 흔들며 이정표 앞에 외롭 듯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