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숙(꽃길걷는 여인·쥬위시타워 보석줍기 회원)
앞에는 소양강 호수가 반짝이고 뒤로는 녹음 짙은 산속에 뻐꾸기 울어대며, 밤에는 달빛에 비추인 강물이 바람결에 너울너울 춤추는 호반의 마을, 강원도 서면이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이다. 과수원 울타리엔 복숭아, 살구, 자두 꽃들이 피고 지고, 오디는 까맣게 익어가며, 배꽃은 수줍은 듯 발그스레한 얼굴로 봄바람을 몰고 온다. 우리집 돌담 사이로 자두나무 꽃이 피어 오르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보려 목을 빼고 한참 동안 높은 나무 위를 쳐다보기도 한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 날에는 과일밭 여기저기 원두막을 지어 오르락 내리락 수박과 참외를 지키다가, 점심 때가 되면 강물을 떠다 열무김치와 오이채를 넣고 고추장 풀어 냉국으로 먹기도 한다. 그 맛이란! 지금도 침이 고인다. 녹음이 짙어갈 무렵 배는 누렇게 익어가고, 원두막에 모기장 치고 밤새도록 서리꾼 지킨다고 사촌들과 떠들며 윙윙거리는 모기 소리를 벗 삼기도 했는데, 가끔 귀도 어둡고 힘도 없는 증조 할아버지가 서리꾼을 지킨다고 밤새 원두막에 올라와계시곤 했던 모습을 떠오르니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동이 트면 나무에 붙어있던 매미가 울어대니 가을이 오는 소리다. 매미 소리를 따라가 잡으려 하면 이 나무 저 나무로 휙 휙 날아가버리고, 고추잠자리는 내 주위를 맴돌며 앉았다 날아갔다하며 슬며시 나를 놀린다. 밤에는 개똥벌레 반짝이는 빛에 놀라 머리끝이 쭈빗해지기도 한다.
이 무렵이면 배도 끝물이 되고 할머니는 넉넉한 마음으로 배를 바구니 가득 채워 윗 마을, 아랫 마을 집집마다 나눠주라 심부름 시킨다. 뉘엿뉘엿 저녁 노을이 짙어가면 강변에 보라색 들국화 향기가 뿜어나고, 갖가지 풀 내음과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의 정서를 깊어가게 한다. 학교 다녀오는 길, 가을 들판에 펼쳐진 파란 배추와 목을 길게 뺀 무가 겨울 김장을 재촉하듯 반쯤 올라와있다. 굵은 무 하나 툭 뽑아 흙 툭툭 털고 손톱으로 껍질긁어 까 먹으면서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며 걷다보면 집으로 오는 먼 길이 지루하지 않다. 단풍 입은 가을이 옷을 벗고 찬바람 부는 겨울에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장독 위에 소복이 내려 흰옷 입은 눈이 엄마의 손을 기다린다. 엄마는 손으로 차가운 눈을 쓸어내려 된장을 퍼다 시래기국을 구수하게 끓여준다. 그 엄마의 손맛이 그립다. 추운 겨울 방 안에선 화롯불을 태우고 그 위에 겨우내 땅 속에 묻어둔 고구마며 밤을 꺼내어 구워 먹는다. 불꽃에 타닥거리며 입을 벌리는 밤을 집으니 이미 얌체같은 밤벌레가 홀랑 먹어버려 약올라하던 기억이 새롭다. 일흔의 나이테를 바라보는 지금, 풍경화처럼 지나가는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이 새록새록 정겹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