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논설위원
팬데믹으로 닫혔던 세상이 열리면서 모임들이 재개되고 있다. 큰 행사는 아직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이지만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소규모 모임은 확실하게 많아졌다. 식당마다 웃음 띤 얼굴들,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들로 활기가 넘친다.
식당들이 정상영업을 시작하던 무렵, 80대인 대선배가 여고 후배들과 점심식사 모임을 가졌다. 5명이 모처럼 만나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의 젊은 신사가 다가왔다. 잘 생긴 백인남성이었다. 남성은 환한 미소를 띠며 “숙녀 분들, 멋진 하루 보내십시오”라고 인사를 하고는 갔다.
신사의 덕담에 숙녀들은 더욱 웃음꽃이 만발했고,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웨이터는 뜻밖의 말을 했다. 다른 손님이 이미 계산했다는 것이었다. 낯선 신사가 숙녀들의 ‘멋진 하루’를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빌어준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친절, 무작위 친절이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남성은 문득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선배는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베푸는 친절은 그 놀라움과 기쁨, 행복감의 정도가 달라요. 배움도 주지요. 이제부터 여유가 있으면 우리도 가끔 다른 테이블 식사 값을 계산해보자고 약속했지요.”
친절은 받는 사람, 베푸는 사람, 옆에서 보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친절은 그 사람만의 선행으로 끝나는 법이 거의 없다. 친절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하나의 작은 친절’(마르타 바르톨 작)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글자 한자 없이 그림만 있는 책이다. 대단히 침울한 여성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반려견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여성은 강아지 사진포스터를 잔뜩 챙겨들고 거리로 나선다. 거리는 회색빛, 세상은 암울하다. 이 거리 저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던 여성이 잠시 멈춰 서서 사과를 꺼내든다. 그때 거리의 악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더 배고플 것 같다는 생각에 사과를 건넨다.
그 광경을 지그시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긴 남성은 행인이 휙 던져버린 음료 캔을 가만히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다. 이 모습을 눈여겨본 남자아이는 풍선을 놓치고 엉엉 우는 여자아이와 마주친다. 아이는 주머니 속 동전들을 털어 풍선을 사서 여자아이에게 준다. 친절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선행의 사슬을 형성하고 마침내 여성이 강아지를 찾는 기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암울했던 세상은 밝아진다. 세상에 ‘하나’로 끝나는 친절은 없다고, 어떤 친절도 ‘작은’게 아니라고 그림책은 말한다.
나의 친절이 너의 친절로 이어지고, 무수한 우리의 친절로 퍼져나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이를 꿈꾸는 단체가 있다. ‘세계 친절운동’이라는 국제 NGO이다. 매년 11월 13일은 이 단체가 정한 ‘세계 친절의 날’이다.
세상은 분열과 갈등으로 잠잠할 날이 없다. 인종, 종교, 성별, 민족, 정치성향, 하다못해 백신의무화 … 벽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경계로 사람들은 갈라지고 반목한다. 심리적 장벽이 너무 강고해서 이론과 이성으로 백날을 싸워봤자 서로 간 설득은 어렵다. 그 닫힌 마음들을 부드럽게 열어서 소통하게 하는 것은 감성. 친절은 감성을 자극한다. 친절이 퍼져서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확산되게 하는 것이 ‘세계 친절운동’의 목표이다.
시작은 일본의 ‘작은 친절운동’이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대 교수 10여명은 친절생활화 시민운동을 펼쳤다. 일본의 이미지가 아직 부정적이던 당시, 외국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른 일본인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오늘날 세계인이 감탄해 마지않는 일본인들의 지극한 친절의식은 그 결과일 것이다. 이후 1997년 미국 영국 등 몇 나라 친절운동 단체들이 도쿄에 모여 회의를 하고 이듬해부터 ‘세계 친절의 날’ 행사를 시작했다.
“친절은 청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고,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언어”(마크 트웨인)라고 했다. 모든 장벽을 넘어 상대방의 가슴에 닿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친절은 세상을 하나로 묶는 황금 사슬”(괴테)이라고도 했다. 갈등과 몰이해를 넘어 화합에 이르는 비법이라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남을 헤아리는 선한 본성이 있다. 본성대로 살면 평안하다. 친절을 행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들고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분비되어서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연구결과들이 그 증거이다. 그러니 친절은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다.
작은 친절로 큰 행복의 물결을 일으키는 일에 모두 동참하면 좋겠다. 내가 웃어준 환한 미소는 누군가에게 그날 처음 맞보는 밝은 순간일 수 있다. 내가 먼저 가라고 양보해준 운전자는 또 다른 운전자에게 양보하면서 안전한 프리웨이를 만들 수 있다. 내가 톨게이트에서 재미삼아 뒤차 통행료를 내준 것이 통행료 내주기 도미노현상을 일으켰을 수 있다. 세파에 시달리며 얼어붙은 마음을 한 뼘만 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친절은 끝이 없다.
한해가 저물며 심신이 추워지는 연말, 작은 친절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친절도 습관이어서 반복하다보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 친절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