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미국 대선은 누가 봐도 현직인 조지 H. W. 부시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걸프전 당시 부시의 업무수행 지지율은 93%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게다가 현직 프리미엄을 감안할 때 거품이 조금 가라앉는다 해도 그의 재선은 의심할 바 없었다.
하지만 부시는 애송이로 여겼던 클린턴에 지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클린턴에 승리를 안겨준 것은 당시 미국이 겪고 있던 짧은 불황을 파고든 캠페인 구호였다. 그 유명한 ‘It’s the economy, stupid’(중요한 건 경제야, 바보야)이다.
클린턴 캠프의 선거 전략가 제임스 카빌이 만들어낸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이 구호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어 놓았다. 경제를 내세운 전략이 먹힌 것이다. 클린턴의 승리는 경제가 대선의 향방을 좌우한다는 공식을 입증해 준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실제로 과거 미국 대선을 보면 경제가 표심에 큰 영향을 미처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들 부시의 경우 이라크 전에 쏟아진 비판에도 불구하고 회복기에 들어선 경제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했으며 버락 오바마는 세계 경제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 공화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다. 유권자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절실한 문제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상관관계로 읽혀진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런 공식이 먹히지 않는다는 분석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경제적 상황이 대선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 같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분석은 정치적 양극화가 갈수록 공고화되고 있는 현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미 정치적 지지의 대상을 굳힌 유권자들에게는 경제상황이 정치적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보다는 이민이나 인종 같은 정치적 문화적 이슈들이 표심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진단은 단순한 정치적 관찰이 아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오바마가 집권하고 있던 2014년 중간선거 출구조사를 보면 민주당 후보들은 “경제가 좋다”고 밝힌 유권자들 표의 4분의 3을 얻었다.
그러나 트럼프 재임 중인 2018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경제가 좋다”고 응답한 유권자들 표 가운데 공화당 후보들이 가져간 것은 51%에 불과했다. 경제적 상황이 정치적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더욱 뚜렷해진 정치적 양극화의 결과로 보인다.
이런 현상과 관련해 이번 대선 역시 예외가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월스트릿 저널은 11월 대선에서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힘을 잃으면서 선거 때 유권자들의 선택에 주요 요소로 작용한 경제의 역할이 불확실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경제 상황에 관한 유권자들의 평가는 실제 실적에 따라 이뤄지기보다는 지지 정당에 따라 갈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신종 코로나19나 리더십 스타일, 인종 등 다른 사안들이 유권자의 선택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면서 유권자들이 경제에 뒀던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에모리 대학 정치학자인 앨런 아브라모비츠 교수는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대선결과를 예측하는 모델의 유효성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경제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과 대선후보에 대한 견해 사이의 연관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는 경제, 후보는 후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