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층이 환자의 대부분인 치과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틀니에 관련된 일들을 많이 다루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로 ‘한 시간 틀이 수선 서비스’라는 것이 있다. 갑작스런 사고로 이가 부러지거나 치통이 생기면 응급으로 치과 치료가 필요한 것처럼 틀니에 관련된 문제도 다급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틀니의 앞니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은 틀니를 하지 않은 사람의 앞니가 하나 빠진 것만큼이나 심각한 상황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30여년 같이 살아온 남편에게도 틀니를 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틀니에 문제가 생겨 낄 수 없게 되거나 앞니 하나가 부러진 상태가 된다는 것은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뿐이지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일로 여겨져 수선을 재촉하게 된다.
진료실에서 앉아 있는 매튜도 빠른 수선을 부탁한 경우로 한 시간 전에 두 조각이 난 틀니를 맡겨놓고 기다리고 있던 환자이다. 나는 수선된 틀니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끼워보라고 했다. 그는 틀니를 입에 넣어 보고는 오케이! 하더니 얼른 다시 꺼내어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는 것 이었다. 나는 놀라서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불편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나는 평소에는 틀니를 끼지 않고 밥 먹을 때만 낍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직업의식이 발동되어 틀니를 계속 끼고 있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먼저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왜 평소에는 안 끼고 계십니까? 틀니가 헐겁거나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칠 수 있는데요.” 라고 했더니 그는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어렵사리 말을 시작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로 4년 3 개월 18일을 지냈어요. 그곳에서 그들은 내 치아를 모조리 다 뽑았죠. 짐작하는 데로 그들은 내 치아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뽑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난 이빨에 관련된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어떤 것도 피하고 싶어요. 식사를 할 때는 할 수 없이 끼지만 틀니를 끼고 있으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평소엔 사용하지 않아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충격과 연민으로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마취도 안하고 생으로 치아를 몽땅 뽑혔다니.. 말을 하는 동안 그의 파란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월남전이 끝난 지 4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기억과 망상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매튜와 고백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그를 그저 평범한 70 대 중반의 노신사로 보았다. 하얀 구레나룻 수염과 파란 눈이 언뜻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역할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런 그가 베트남 전쟁 포로 생활을 얘기할 때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통과 공포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계속되는 대화중 4년 3 개월 18일 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그 포로 생활동안의 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지옥 같았을까. 그러기에 그곳에서의 하루란 매 순간이 아마도 날짜가 아닌 일분일초의 단위로 그에게는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모자도 안 써요. 모자를 쓰면 내 머리에 씌워졌던 양동이가 생각나서요.”
매튜의 말을 들으며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램보’라는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액션 배우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연으로 나온 월남 전쟁을 다룬 영화였다. 주인공 램보가 베트콩의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상상하기조차 힘들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것을 보았다. 그 중의 하나로 양동이 가득한 물을 그에게 뒤집어씌우고는 그 양동이를 씌운 상태로 고문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눈앞에서 그 실제 상황이 연출되는 것 같았다.
전쟁 중 외상을 당하면 상이군인 이라 칭한다. 그런데 매튜의 경우 눈에 보이는 외상은 아니지만 어쩌면 신체의 일부를 잃은 것만큼이나 더 크고 지속되는 불구를 지니게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수족을 잃어 그것을 보완하는 보조 장치를 부착했는데 그것을 사용 할 때마다 과거의 고통이 되살아나게 된다면 어떻게 완전한 재활이 가능하겠는가. 일테면 그의 틀니는 그가 먹고 말하고 웃고 숨 쉴 때조차도 그의 처참했던 과거를 연상시키는 도구일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가 겪는 증상은 요즘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의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나 손실, 또는 공포나 불안했던 기억이 계속적으로 재경험되면서 그때 느꼈던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되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피, 각성 등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신체적 결함은 없으나 기억속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계속 남아 현재의 생활을 방해하는 정서적 외상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들 대부분도 과거 기억의 굴레가 현재의 행동과 결정을 제한할 때가 많음을 깨닫게 된다. 수제비를 싫어하는 내 남편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는 식성이 까다롭거나 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유독 수제비만은 싫어한다.
언젠가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어릴 때 너무 많이 먹어서 싫다며 심드렁하게 대꾸를 했다. 그렇다면 매일 먹는 밥이나 김치도 싫어해야 되는데 그건 아니지 않는가.
그가 수제비를 싫어하는 것은 많이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제비는 그에게 가난하고 암울했던 어릴 때 기억을 되살리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수영을 못하고 물을 무서워하는 것도 어릴 적 개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느꼈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소치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소한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남아서 때때로 우리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드는데 전쟁 포로 생활이라니. 매튜같이 극한 상황을 겪은 사람이라면 그 기억의 굴레 속에서 아직도 고통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하죠. 지금 잘 살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틀니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아직도 친해질 수 가 없네요.”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하는 매튜의 손을 잡으며 내가 대답했다.
“그곳에서 무사히 돌아와서 오늘 저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정말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틀니와도 조금 더 친해지기를 바랍니다.”
진료실 문을 나서는 매튜의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 그것은 이따금 만나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연대책임 의식 같은 것이다.
그들은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면 대부분은 반가워하며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등의 기억나는 한국말 몇 마디와 함께, ‘인천 상륙 작전 때에 내가 해병대원으로 그곳에 있었지‘ 등의 무용담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런 애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괜스레 서글퍼지면서 마치 내가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채무자 같은 기분이 들곤한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목숨을 걸고 싸워야했던 그들, 얼마나 많은 그들의 동료가 전사했으며 부상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조차도 늘 의식의 어딘가에는 끔찍했던 전쟁의 환영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어 수시로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누리는 평화와 안녕은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 천재지변과 재난의 소식들을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외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위안부 할머니의 눈물이, 중동 어디에선가 아이시스 테러범의 손에 의해 처형당한 한 신문 기자의 공포와 절망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되고 기억의 굴레로 남아서, 평화를 추구하며 연민을 나누는 작은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매튜의 뒷모습은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