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수필] F코드, 내 인생의 굳은살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7-20 10:20:06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F코드, 내 인생의 굳은살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친구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아래로, 투박해진 손끝으로 지판을 꾹 누르며 애쓰는 친구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아이고, 손가락 터지겠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줄 하나가 맑은 소리를 낼 때마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다. 이렇게 늙어서 기타를 치며 놀게 될 줄 예전에 상상이나 했겠냐며 굳은 손가락을 달래는 친구를 보면, 내 마음에도 노년의 설레는 낭만이 싱그럽게 전해져 온다.

 

내가 처음 통기타를 잡은 것은 여고 2학년 생일날이었다. 청바지에 통기타, 포크송이 한창 유행하던 1970년대였으니, 기타 선물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다행히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운 덕분에 악보를 혼자 익히는 것은 수월했다. 엄격하고 고전적인 피아노 연습에 잔뜩 싫증을 느끼던 차에, 통기타 화음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모습은 내게 자유와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달콤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른바 ‘F코드’라는 통곡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기타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알파벳 한 글자에 불과하겠지만, 초보 연주자들에게 F코드는 거대한 암벽과 같다. 검지 하나를 막대기처럼 곧게 펴서 기타의 여섯 줄을 한꺼번에 눌러야 하는 이른바 ‘하이 코드’의 시작점이다. 한 손가락으로 여섯 줄을 단단히 누른 채,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는 다른 음을 짚어야 하니 손에 힘이 여간 들어가는 게 아니다. 아무리 손아귀에 힘을 주어 봐도 줄은 맑은 소리 대신 ‘틱틱’거리는 탁한 잡음만 뱉어냈다. 온 힘을 쥐어짜다 보면 손가락에 쥐가 나고 손목엔 통증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통기타를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어릴 때 이미 F코드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서 평생 초보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이번에는 젊은 날의 성급함을 내려놓고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여전히 손가락은 뻣뻣했고 나이 때문에 오히려 F코드의 벽은 더 높았지만, 조급해하기보다 매일 꾸준히 지판을 누르는 연습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신기하게도 세월의 무게만큼 가라앉은 마음으로 버티다 보니, 어느덧 손끝에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였다. 그리고 어느 날, 늘 탁한 소리만 내던 지판 위에서 거짓말처럼 "딩~" 하고 투명하고 청아한 F코드의 첫 화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하면 되는구나, 하는 기쁨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완강하던 벽을 마침내 넘어섰다는 그 맑은 소리의 희열은, 젊은 날 맛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승리감이었다.

 

사실 다시 기타를 잡고 연습하는 동안 깨달은 진짜 비밀은 따로 있다. F코드에서 검지는 무조건 뻣뻣하게 펴고 힘을 잔뜩 준다고 해서 맑은 소리를 내어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손가락에 들어간 억지힘을 적당히 빼고 부드럽게 지판을 밀듯이 눌러주면, 지탱하는 검지도 덜 아프고 나머지 세 손가락도 비로소 유연하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내 손아귀 힘만 믿고 지판을 움켜쥐던 젊은 날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이 힘의 조율은, 우리네 삶의 행로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지혜인지도 모른다.

 

F코드의 화음을 내기 위해 거친 굳은살을 감수했던 것처럼, 돌아보면 낯선 타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짐을 묵묵히 감당했던 고단한 시절이 있다. ‘가장’이라는 무게로, 혹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가 흔들리면 집안의 화음이 깨진다는 생각에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버텨내던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아등바등 내 힘만으로 삶의 줄을 꽉 움켜쥐려 할 때마다, 정작 주변의 소리들은 탁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내가 조금은 힘을 빼야 주변이 편안해지고, 내 어깨의 긴장을 풀어야 비로소 가족이라는 화음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유롭고 아름답게 울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완강한 F코드 앞에서 배운다.

 

지금도 F코드는 여전히 소리 내기 힘든 코드다. 그러나 이제는 쥐가 날 듯 힘껏 누르던 검지에서 힘을 슬며시 빼고 지그시 줄을 달래본다. 숱한 고집과 긴장 끝에 굳은살을 남겨준 F코드, 고단한 세월을 버텨내고 이제는 힘을 뺄 줄 아는 내 인생에게, 통기타가 건네주는 가장 다정한 위로가 아닐까 싶다.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애틀랜타 칼럼]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 보셨나요

세상은 지금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도덕적 혼돈, 사회적 혼돈, 정치적 혼돈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 혼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란 무

[법률칼럼] 이민국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보완 기회’보다 중요한 첫 접수

케빈 김 법무사미국 이민제도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이민 신청서에 서류가 부족하거나 설명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추가서류요청(RFE)이나 거절의도통지(NOID

[행복한 아침] 여름 소식

김 정자(시인 수필가)   소나기가 내리려는 지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어느 새 주위가 어둑해 지고 섬광이 번쩍인다. 순간 격정적으로 쏟아지는 비가 폭우로 변한

[독자기고]  고 짐 레이니 대사님 영전에
[독자기고] 고 짐 레이니 대사님 영전에

고(故) 짐 레이니 대사 영전에. 전 에머리대 총장이자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짐 레이니 대사의 영전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박경자."해물 순두부 좋아해요." 정확한 한국말로 순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한미 동(혈)맹의 중요성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한미 동(혈)맹의 중요성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헌법정신 위에 어떻게 세워졌는가? 8, 15 광복절 81주년 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이 진지한 물음 앞에서, 겸허해

[신앙칼럼] 가을의 향성, 투르게네프의 언덕 (The Tropism of Autumn : Turgenev's Hill, 마태복음 7:1~12)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서론]“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19)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19)

2026 연방 보조금(SSI) 연례 보고서 발표와 취약계층 복지 시스템의 대대적 혁신 SSI 전담 개혁실 신설, 실시간 금융·소득 검증을 통한 오지급 방지와 수급자 보호 강화 천경

[추억의 아름다운 시] 승무(僧舞)

조지훈 / 시인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니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

[삶과 생각] 미국의 승리와 8.15 광복
[삶과 생각] 미국의 승리와 8.15 광복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오는 8월 15일은 광복 79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79년간 광복절 기념행사를 해 온 것은 거룩하고도 감사한 민족 해방의 국경일이기

[수필] 삶의 축을 찾아가는 길
[수필] 삶의 축을 찾아가는 길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요즘 들어 지난날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는 일이 늘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터다. 그래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기억들이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