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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음의 사슬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6-15 10:23:11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마음의 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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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은퇴 후 일상을 위해 세웠던 계획이 우연한 기회에 바뀌었다. 여유롭게 쉬면서 여행이나 다니려던 계획에서 내가 가진 작은 재능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로 방향을 돌렸다. 이 변화의 시작은 시니어들에게 건반과 기타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 접하는 악기가 서툴러 손가락을 뚝딱거리면서도, 차츰 실력이 늘어갈 때 그분들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내 삶에도 큰 활력이 되었다. 날로 다듬어지는 연주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릴 적 매섭게 꾸짖으시면 서도 내게 음악적 재능을 길러주셨던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하지만 교실에서 시니어들을 마주하다 보면 가끔 마음이 복잡해지는 순간과도 맞닥뜨린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거나 진도를 따라오기 힘들 때, 너무나 쉽게 나이를 핑계 삼는 분들이 많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충분히 나아질 텐데도, "돌아서면 잊어버릴 나이"라거나 "늙어서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며 지레 포기하곤 한다. 가끔은 연세를 앞세워 수업 진행을 은근히 주도하려는 분도 계신다.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속이 상한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정성으로 찾아온 자리인데, 당장이라도 다 내려놓고 가버릴까 하는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

 

사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그 정도의 어깃장이나 투정을 받아내는 것쯤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요양 시설에서 어르신들과 부대끼며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내공이 내게도 있지 않은가. 서운한 마음을 달래고 다독여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솔직히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매번 입을 꾹 닫고 못 들은 척 지나치는 까닭은 따로 있다. 혹시라도 ‘늙었다고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그분들의 마음에, 자칫 내 설익은 말 한마디가 작은 상처로 덧날까 조심스러워서다.

 

그렇다. 황혼의 길목에서 건반을 누르고 기타 줄을 튕기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젊은 날의 배움보다 몇 배의 인내가 필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에 기꺼이 첫발을 내딛은 그 용기만큼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출발선은 같아도 모두가 같은 속도로 걸을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어떤 이는 한참을 서성거리며 더디게 따라온다. 그 격차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원인은 신체적인 노화보다는 그들 마음에 견고하게 들어찬 '벽'인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서커스단에서는 아기 코끼리가 처음 들어오면 튼튼한 말뚝을 땅에 박고 굵은 쇠사슬로 발목을 단단히 묶어둔다고 한다. 힘없는 아기 코끼리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사슬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결국 깊은 좌절 속에서 아기 코끼리는 자포자기를 배운다. 세월이 흘러 코끼리 덩치가 집만 해지고 힘이 장사가 되었을 때, 이제는 고작 얇은 밧줄과 가느다란 나무 말뚝 하나에 묶어두어도 코끼리는 절대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이미 마음의 사슬에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교실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손마디가 조금 굳고 눈이 침침할 뿐이지,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익힐 그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뇌는 결코 멈춘 게 아니다. 조금만 여유를 두고 연습을 하면 충분히 멋진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나이에 내가 뭘 하겠냐'며 스스로 한계를 긋고 포기하거나, 나이를 앞세워 투정을 부리며 클래스를 흔들려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강사로서의 인내심이 시험대에 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서운함은 번번이 눈 녹듯 사라진다. 교실 안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가르치며 얻는 보람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특히 날로 눈에 띄게 향상되는 그분들의 연주 실력을 마주할 때면, 온몸에 행복 호르몬이 도는 듯한 짜릿한 기쁨이 차오른다. 이 맛에 내가 은퇴 후 계획까지 바꿔가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 서툰 투정들을 조용히 삼키고 못 들은 척 지나쳐 버린다. 그러고는 다시 그분들의 손을 잡아 건반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교실에서 해야 할 진짜 일은 도레미파 음계를 가르치는 기술적인 전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니어가 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발목에 차고 살게 된 ‘나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을 이제 그만 끊어내라고, 아직 당신에게는 그 마음의 말뚝을 단숨에 뽑아버릴 거대한 힘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일. 그 눈빛의 위로와 격려가 앞으로 내 십 년의 대계를 채울 진짜 공부이자 사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깊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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