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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머무는 뜰] 사랑으로 길들여질 나날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5-20 10:21:48

삶이 머무는 뜰, 조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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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혜 수필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낭만을 느끼는 몇몇 단어가 있다. ‘길들여진다’도 그중 하나다. 아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하지만 오래 잊고 살았다. 관계를 맺고, 시간과 마음을 쏟아 서로에게 단 하나의 의미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가 아니었음을 말이다. 세상엔 어딘가에 길들여져 끝내 고유한 정체성을 잃고 마는 슬픈 이야기도 존재한다. 지난해 가을 조지아 주 북부 블루리지에 위치한 침팬지 보호소 ‘프로젝트 침스(Project Chimps)’에서 만난 침팬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프로젝트 침스를 찾은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실험실에서 은퇴한 침팬지들을 위한 시설이란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관람 예약 전날 보호소 바로 앞 통나무집에서 잠 들며 늦은 시각까지 들려오는 ‘우후후’ 하는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오직 한 종만 사는 거대한 동물원 같은 곳일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노는 거침로운 영혼을 상상하며 잠을 청했다. 

핑크빛 환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둘러보고 자원봉사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그들의 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 침스에서 지내는 100여 마리의 침팬지는 온갖 실험으로 노화가 빨리 찾아오고 관절과 근육이 약해진 경우가 허다했다. 반복되는 악조건 속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침팬지까지 있었다.

더 슬픈 현실은 이들이 야생 본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좁은 실내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침팬지들은 본성을 잊은 지 오래였다. 대부분 연구소에서 태어나 흙도, 나무도 만져본 적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나이는 많아도 세상과 처음 마주한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는, 인류의 욕심이 낳은 희생양이었다. 

가이드는 이곳 침팬지들은 사냥 법을 모르는 것은 물론, 면역 체계가 약해 스스로 살아남을 힘이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새삼 느꼈다. 그녀는 무분별했던 동물 인권 착취에 씁쓸해하면서도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 감사하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침팬지 한 마리와 교감을 나누었다. 

“순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어 형편이 넉넉하진 못해요. 대신 고급 시설이나 먹이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한답니다. 제 정성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이 활동에 만족해요. 이름을 불러주면 알은체하며 다가와줄 때 가장 보람차요.”

자신들을 괴롭혔던 사람을 향한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친구가 되는 데서부터 그들의 회복은 시작된다. 자원봉사자들은 이 순간이 오랫동안 곪은 상처에 가장 좋은 약이라고 굳게 믿으며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간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침팬지들에게 가만히 바람의 숨결을 느끼는 평화로운 순간을 선물하는 것만큼 값진 일이 또 있을까? 이곳에 무보수로 일하는 장기 봉사자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봉사자들이 입을 모아 잊지 못할 순간이라 손꼽는 건 두 살 때 뉴욕 연구소로 보내진 허큘리스와 동료 레오의 적응기다. 두 발 걷기를 강제로 학습당한 둘은 십 년 넘게 딱딱한 바닥만 밟아왔다. 그들이 풀밭에 처음 섰을 때 초록의 품을 두려워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드라운 흙의 감촉이 낯설어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마침내 자연을 택했다. 태어나 처음 지붕 없는 하늘 아래서 느린 숨을 내쉬는 모습에 봉사자 모두 울었다고 한다. 

더 이상 연구 대상으로 통제받지 않고 주체적인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 생명체로 존중받으며 아픔 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침팬지들이 뒤늦게 누리는 최고의 혜택이다. 그들은 햇볕 아래서 나른하게 늘어지거나 친구 옆에 기대앉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평온함을 만끽한다. 이제야 우리와 닮았다는 이유로 고통받던 소중한 생명들이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겐 여전히 철망이 필요하다. 끝내 드넓은 자연을 맛보지 못하고 7천여 평의 숲만 허락될 테다. 인간의 욕심은 그들에게 완벽한 야생의 생활을 돌려주지 못하는 비극을 낳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 남은 생은 혹독한 실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따뜻한 관심과 애정 속에서 보낼 수 있어서다. 

20년 넘게 시험 도구로만 취급받던 멸종 위기의 영장류들이 생의 후반은 사랑 속에 길들여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프로젝트 침스의 존재 가치는 충분했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단순한 보호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상처 입은 존재들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회복의 터전이었다. 

이민 온 지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종종 이 땅에 얼마나 길들여졌을까를 생각한다. 대중교통이나 걷기에 익숙한 몸은 언제쯤 운전에 익숙해질까. 모국어의 반만큼이라도 영어가 입에 붙는 날이 올까. 눈빛만으로도 맘이 통하는 친구를 또다시 사귈 수 있을까.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닐는지. 어린 왕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여우의 솔직함, 회색 세상에서 살던 침팬지가 처음 풀밭을 내딛을 때의 담대함도. 어느 순간이든 사랑을 선택한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이미 내 발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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