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애틀랜타의 붉은 흙 위에서 어느덧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이민자의 삶이라서 일까,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메우려 애썼던 긴 여정이었다. 청춘은 생존을 위해 분주했고, 어느 시절엔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위태로운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어느새 노년에 들어서는 나이, 은퇴가 코앞이지만 나의 일상은 여전히 일터를 향한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삶을 즐기는 친구들이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도 나름의 풍요를 누려왔음을 인정한다. 남들처럼 넉넉지 못한 처지에서도 나름 나만의 풍요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결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유하지 못한 형편이 남긴 열등감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나만의 은신처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북적이는 모임이나 유명 관광지 대신,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클래식의 선율과 정갈하게 닦인 문장들 속에서 생의 허기를 채웠다. 책 속의 사상, 오페라의 아리아, 발레무용수의 가냘픈 몸짓은 고단한 내 생활을 지탱해 준 안식처였다. 음악회에 머무는 시간을 지루해하거나 표 한 장의 값을 아까워하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공연장을 찾아가는 길은 늘 외로우면서도 고즈넉했다.
그런 내게 취향의 결이 꼭 닮은 친구가 생겼다. 이국땅에서 느지막한 나이에 생각의 주파수가 맞는 이를 만나는 것은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우리는 공연 표를 사기 위해 생활비를 아끼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다. 비록 무대와 먼 뒤편 관람석에서 오페라 글래스를 통해 감상할지라도, 함께 숨 죽여 선율을 따라가고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는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나 요즘, 그토록 귀한 친구를 마주하는 일이 조심스럽고도 아프다. 친구는 지금 항암 치료로 사투를 벌이는 남편을 간병하고 있다. 야윈 그녀의 얼굴을 대할 때면 나는 암담하다. 무력감에 빠진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의 곤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이미 암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환자로서 겪었던 막막한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양로원을 운영하며 삶의 마지막 끈을 놓는 노인들의 곁을 지켰던 시간들이 친구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중물이 되어준다. 간병의 여정 끝엔 필연적인 이별이 기다리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남는 것은 시린 후회뿐임을 짐작하기에 마음이 저릿하다.
가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면 나는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 대신, 오직 지금 할 수 있는 일에만 마음을 두라는 투박한 위로를 건넬 뿐이다. 예전처럼 음악과 문학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던 활기는 잠시 사라졌을지 모르나, 지금 이 적막한 공감 또한 우리가 공유해 온 예술의 연장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슬픔의 교향곡이 흐를 때는 그 선율이 다 지나갈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임을 안다.
문득 친구의 상황이 떠오를 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녀의 슬픔을 오롯이 담아낼 빈 그릇이 되기를 기도한다. 생애 가장 시린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친구가 스스로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훗날 이 고통의 시간을 돌아보며, 그 속에 머물렀던 아주 작은 온기 하나로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우울한 마음을 어루만질 낮은 선율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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