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켄트 케이스(Kent M. Keith)는 현하, 그의 명시, “그래도 어쨌든(Anyway)”의 서론에서 ‘이웃’이라는 ‘사람들’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정의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People are often unreasonable, illogical, and self-centered.”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초미의 관심사를 가지고 예수님께 드린 유대인 율법교사의 질문은 현하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영생>의 해법으로 풀고싶은 율법사의 질문이자 현대를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동일한 질문입니다. ‘이웃’의 개념을 통하여 예수님은 차원높은 관점으로 대화의 모토로 삼으십니다. 일반적으로, <2차원적 이웃>은 동류항은 동류항끼리 묶는 수학적 사고방식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이웃>이란, ‘나와 같은 민족, 같은 신앙, 같은 계층,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곧 <이웃입>니다. 이 전통적인 사고와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던 율법사의 질문의 근본은 <전통적인 고정관념>입니다. ‘이웃’은 <분류의 결과>이고, <경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을 차원 이동시키십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강도 만난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는 <’이웃’이 같은 민족, 같은 계층, 같은 가치관의 사람의 낯익은 지인>의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방법을 묻는 율법사에게 정곡의 해답은 <낯선 이웃>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이웃(Strange Neighbor>의 개념은 형용모순(形容矛盾, Oxymoron)의 개념입니다. 복음은 서로 상충되고 모순적인 관계의 사람들을 자비의 마음으로 포용하는 <옥시모론 예수의 복음>입니다. 분명히 낯설고 이질감의 형용사인 “낯선”이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에게 이질감과 배타적인 관계인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2차원적 사고의 ‘동족’이라는 경계에서 조금도 이탈할 수 없는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웃>은 바로 옥시모론적인 차원으로 <회심(Conversion)>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이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적인 개념에 빠져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도전>으로 율법의 에센스를 주신 것은 <이웃사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혁명적 사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가치관을 가진 율법사에게 ‘경계’의 신개념으로 도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오경 중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이웃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Neighborhood)>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4차원적 이웃, 차원 높은 이웃은 분류가 아니라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정체성이 아니라 행동, 소속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었는가”(눅 10:36) 즉, 이웃의 참된 개념은 ‘누가’가 아니라 ‘내가’에서 발단합니다.<이웃(Neighborhood)>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2차원에서는 “이웃”이 <주어>이지만, 4차원에서는 “내”가 <주어>가 됩니다. 이웃은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여 ‘되어지는 관계’>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될 이유가 없었지만, 이웃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지금도 우리를 향합니다. “그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복음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웃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가까워진 사람>이며 이웃의 시작은 언제나 <내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는 동일한 질문으로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며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먼저 살폈고, 자신의 입장을 계산했고, 자신의 일정과 안전을 핑계 삼았음을 고백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옳은 이유를 들고 조용히 지나가게 하소서가 아니라, 머물러 서게 하소서. 주님, 이웃은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임을 알아차리게 하시고, 가던 길을 멈추는 믿음, 지갑을 여는 사랑, 내일을 맡기는 순종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발걸음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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