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연필을 깎는다. 사각거리며 나무가 깎이고 검은 심이 뾰족하게 갈리고 나면 비로소 빈 도화지 위에 선을 그을 준비가 끝난다. 최근 스케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날엔 직선을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직선이 모여 면을 이룬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나니, 그 다음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정물인 ‘구(球)’를 그려내는 일이었다.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구의 외곽선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 번에 완벽한 원을 그리려 할수록 선은 빗나가고 형태는 찌그러진다. 짧고 부드러운 선들을 여러 번 겹쳐가며 형태를 찾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되새긴다. 강사의 조언을 따라 한 선 한 선 긋다 보니 비로소 ‘공’의 윤곽이 드러난다. 갈팡질팡 엇나가는 듯 보이는 서툰 선들이 겹치고 쌓이면서 선의 밀도가 높아지니, 어설프긴 해도 비로소 ‘면’이 된다. 체본으로 받은 매끄러운 둥근 공 사진을 들여다보니, 내 인생의 한 단면을 옮겨 놓는다는 기분이 든다.
평면이었던 동그라미 안에 선이 겹쳐질수록 어둠이 짙어지고, 공은 서서히 입체감을 보이며 나타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가장 어두운 곳부터 손을 대야 한다. 스케치에서 가장 역설적인 대목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이라이트 부분은 오히려 아무런 연필질도 하지 않은 빈종이 그대로다. 그 주위의 어둠을 섬세하고 정직하게 채워 내려가야만 하얀 여백의 빛이 드러난다.
단 한 번의 획으로 완성되는 그림은 없다. 문득 깨달음이 온다. 우리네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바로 이런 선들이 아닐까?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화려하게만 보였던 성취의 순간들은 사실 그 주변을 묵묵히 채우고 있던 고통와 실패의 시간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어두운 면을 채우는 연필질이 고될수록 빛은 더 선명해지듯, 인생의 어두운 터널 또한 삶의 환한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림자를 그리는 일은 빛의 방향과 각도를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다. 마치 잊고 싶었던 내면의 상처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의 가장 짙은 그림자는 젊은 시절 암과 싸우던 때였다. 정맥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항암약물은 내 몸의 생기까지 남김없이 훑고 지나갔다. 지독한 메스꺼움에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고,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상실감에 젖던 날들. 뼈 마디마디가 으스러지는 통증 속에서 밤잠을 설치던 그 시간은 마치 도화지 위에 너무 많은 선을 겹쳐 그어 종이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와 같았다.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며 내가 그었던 비명 같은 그 사선들이,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 스케치북 위에서 둥근 공의 밝은 부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림자가 되고 있다. 그 때 고통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내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었을까. 스케치북 위를 지나는 연필의 궤적을 따라가며 다시금 지난 날을 되돌아본다. 내가 그은 보잘것없는 선 하나가 당장은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것들이 모여 면이 되고 입체가 된다는 진리에 감탄한다. 비록 손가락 끝이 연필 가루로 검게 물들고 어깨가 뻐근할지라도, 나는 이 정직한 노동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이제 종이 위에는 제법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공 하나가 놓여 있다. 초보자의 서툰 솜씨로 수백 번의 선을 그려 만들어낸 이 형상은, 쉬지 않고 살아온 시간들의 기록이자 앞으로 채워나갈 미래의 예고편 같기도 하다. 완벽한 구를 그리기 위해서 반대편의 숨겨진 곡선까지 상상하며 선을 그리듯, 보이지 않는 너머의 고통과 타인의 숨겨진 슬픔, 감추었던 내 삶의 상처까지 돌아보며 살아가고 싶다.
도화지 위에 남겨진 연필의 흔적들이 말해주듯이, 서툰 손길로 그은 선들이 겹겹이 쌓여 삶의 밀도가 깊어지듯이, 내 삶도 아름답고 단단한 입체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본다. 흔들리며 그어온 모든 선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 모든 어둠이 결국 빛을 향한 여정이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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