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암살 가담한 군인과 변호인 이야기…조정석 흡인력 강한 연기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이선균의 유작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암살한 인물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김재규의 부하 직원 몇 명도 사건에 연루돼 그와 함께 재판받고 처형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 중에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이던 박흥주(당시 40세) 육군 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청빈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이들은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봄 처형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당시 재판도 그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10·26 사건에 연루된 김재규의 부하 중 유일한 군인 신분으로 단심제가 적용돼 바로 사형이 확정됐던 박흥주의 재판을 상상으로 재구성한 영화가 나왔다. 천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의 신작 '행복의 나라'다.
박흥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 박태주(이선균 분)의 변호를 맡은 정인후(조정석)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박태주의 시각으로 재연하면서 시작한다.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사건 가담자들이 재판에 넘겨지고 변호인단이 꾸려지지만, 박태주의 변호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애를 먹는다.
변호사 이만식(우현)이 이끄는 변호인단은 승소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젊은 변호사 정인후에게 주목하고, 우여곡절 끝에 그를 영입한다.
정인후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박태주는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박태주가 군인이자 대한민국 국민,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겪었을 고뇌가 깊이 있게 조명되지는 않은 느낌이다.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행복의 나라'는 지난해 개봉한 '서울의 봄'을 떠올리게 하지만, 초점도 상이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크게 다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모티브로 한 전상두도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열기를 내뿜는 전두광과 달리 극히 차가운 전상두를 그려낸 유재명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행복의 나라'의 모티브가 된 박흥주 재판은 역사적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김재규를 비롯해 10·26 사건 가담자로 처형된 이들의 유족은 사건의 재평가와 복권을 희망하고 있다. 2020년 김재규의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4월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문기일을 열었다.
'행복의 나라'는 올여름 후반부 극장가를 달굴 작품 중 한 편으로 꼽히며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이선균의 유작이기도 하다.
14일 개봉. 124분.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