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인플레 속 한인들 은퇴준비 실태·대책은
라크레센타에 위치한 도요타 딜러에서 20년 넘게 세일즈맨으로 근무하고 있는 영 이(60)씨. 당초 목표했던 65세 은퇴 계획를 가능한 오래 일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이씨는 “50대 때만해도 남들보다 일찍 ‘폼나게’ 은퇴하는 게 꿈이었지만 고물가·저성장 시대에 아무래도 조기 은퇴는 부담이 될 것 같다”며 “10년 정도 더 일하면서 401(k) 불입금도 최대한 늘려 은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려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코로나19 대유행의 여파로 미국 내 베이비부머 세대(1946~1964년생) 은퇴 러시가 가속화됐지만 올해 들어선 증시 급락과 고물가 시대의 영향으로 은퇴를 미루거나 은퇴 후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는 한인들이 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이비부머 세대 가운데 80%는 아예 은퇴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면 다른 일이라도 찾겠다는 것이다. 은퇴한 뒤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응답은 16%에 지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시작됐던 2020년 자신이 운영하던 소매업소의 문을 닫고 은퇴했던 피터 고(65)씨는 최근 한 도매업체 웨어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고씨는 “모아 놓은 은퇴자금이 충분하지 않은데다 조기수령한 소셜연금으로는 생활비가 충분하지 않아 2년만에 새 일자리를 찾았다”면서 “몸은 고되지만 건강히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자신이 하는 일 외에 파트타임 형식으로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사례도 많다. 애너하임에서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는 김혜성(58)씨는 출퇴근 길에 우버 택시를 운전한다. “다행히 가게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한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매장을 오가는 길에 우버 택시를 몰고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스티브 권(55)씨는 ‘더블 잡’을 넘어 ‘쓰리 잡’을 뛰고 있다. 그는 낮에는 사무직으로 근무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풀러턴의 한 대형교회 새벽예배에 참석하려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교회 미니 밴을 운전한다. 토요일에는 주말 한국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권씨는 “은퇴 계획도 문제지만 대학생 자녀가 2명이라 학비부담도 만만치 않다. 이민 후 일을 하지 않았던 아내 역시 취업해 부부가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부족한 은퇴 자금과 페이먼트 부담을 메우려 살던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한인들도 많아졌다. 황근(62)씨는 밸리 지역의 집을 팔고 지난 4월 카슨의 한 시니어 모빌홈 단지로 이사하면서 다운사이징을 했다. 총 429 세대가 거주하는 이 단지에는 황씨를 포함 131명이 한인들이다.
황씨는 “오랫동안 운영하던 비디오 렌털 업소를 접고 사실상 ‘반 은퇴 상태’인데 모기지 페이먼트를 줄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덕분에 생활비가 크게 줄어 파트타임 일이라도 잡으면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선호하는 실비치 레저월드 등 시니어 주택단지에도 살던 집을 팔고 다운사이징을 하려는 한인들의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다운사이징 대신 집을 담보로 그동안 쌓인 에퀴티 한도 내에서 일시불 혹은 페이먼트 형식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역 모기지(reverse mortgage)에도 한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얼마 전 역 모기지를 신청한 박대호(62)씨는 “집의 소유권을 유지하면서도 역 모기지로 빌린 돈은 집을 팔거나 이사를 가지 않은 한 갚지 않다도 된다는 설명을 듣고 신청을 결심하게 됐다”며 “역 모기지로 받은 돈을 은퇴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새차 구입을 미루는 등 생활비를 줄이려는 한인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2년 후 교사직에서 은퇴할 예정이라는 캐롤라인 오(60)씨는 당분간 새차나 신형 가전용품을 사지 않기로 했다. 오씨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또 다른 페이먼트가 시작된다면 부담이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편 온라인 재정정보 업체인 뱅크레잇 닷컴은 경기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은퇴시점이 다가 올수록 수입의 20% 이상은 무조건 은퇴자금으로 저축하고, 꼼꼼하게 예산을 짜서 과소비를 막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