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 불가항력” 수입국에 서한, 독일행 등 가스 공급 중단 예고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이 유럽행 가스공급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사전 조치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에 앞장선 유럽연합(EU)에 보복 조치의 강도를 높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 유가도 러시아산 가스 공급에 대한 중단 우려 등으로 일주일 만에 다시 100달러를 돌파했다. 에너지 수급 대란에 유럽 경제가 위기에 몰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18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가스프롬은 이달 14일 일부 유럽 천연가스 수입사에 보낸 서한을 통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가스 공급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불가항력 선언’을 했다. 불가항력 선언은 무역 거래 중 재난이나 전쟁 등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계약자가 계약 이행 의무를 면할 수 있는 조치를 말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향후 가스 공급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한 것이다.
가스프롬의 서한은 독일 최대 가스 수입업체인 우니퍼와 대형 전력회사인 REW 등이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BBC방송은 “가스프롬이 불가항력을 선언한 대상은 독일에 가스를 공급하는 주요 수단인 가스 파이프라인 ‘노르드 스트림1’을 말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가스프롬은 정기 점검을 이유로 이달 11일부터 노르드 스트림1의 가스공급을 잠정 중단했다. 당시 가스프롬은 이달 21일부터 재가동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서한으로 재개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불투명해졌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은 천연가스 수요의 55%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등으로 향하는 러시아산 가스의 환승 허브 역할도 해 가스프롬의 조치가 유럽 전역의 에너지 수급에 상당한 피해를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올해 겨울철에는 난방 연료인 천연가스의 수요가 급등해 유럽 내 에너지난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점쳐진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가스프롬의 이번 조치로 유럽 내 공급망 붕괴 등 경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독일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수입해 난방뿐 아니라 플라스틱 등 화학 소재 생산에도 활용해 유럽에 공급해 왔기 때문이다. 천연가스는 산업 분야의 핵심 소재인 플라스틱과 기타 화학 물질 등을 만드는 원료로도 쓰인다.
귄터 오에팅거 전 EU 에너지 위원은 “이번 사건은 가스와 석유를 원료로 하는 석유화학 부문에서 범유럽 공급망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EU 집행위원회는 공급망 붕괴 등을 감안하면 러시아 가스 공급 중단으로 EU의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1.5% 감소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러시아산 가스 공급에 대한 우려로 이날 국제 유가도 100달러를 재돌파했다. 미국 CNBC 방송에 따르면 9월물 브렌트유는 전 거래일 대비 5% 상승한 106.27달러에, 8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5.13% 오른 102.6달러로 집계됐다.
지난주 글로벌 경기침체 전망으로 100달러 이하로 내려갔던 국제 유가가 일주일 만에 다시 100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국제 유가가 안정화되려면 중동 산유국들의 증산 계획이 필수적이지만, 산유국들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유럽에 러시아발 에너지 대란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다. 유럽의 가스 소비를 상당히 줄이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산업용 가스 경매 플랫폼을 도입하는 등 EU가 통일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롤 총장은 “유럽은 이제 러시아의 가스 공급에 대한 끊임없는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며 “이번 겨울은 에너지 부문을 훨씬 넘어서는, 유럽 연대의 역사적인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