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의식 높지만 성평등 정책엔 반대
“페미니즘은 이기적^남성혐오”인식하지만
“여, 살림해야, 남, 능력우월”생각은 안 해
“여성전용 주차장 등 지나친 요구”반감
편견으로 생긴 정책, 우대정책으로 착각
소수 분파만 보고 페미니즘 자체를 거부
“페미니즘은 성평등 이념에 입각해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여성참정권 운동가 위베르틴 오클레르, 1892년)
“여성을 해방한다는 것은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에 가둬놓기를 거부하되 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1949년)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더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다.” (여성인권 운동가 리베카 솔닛, 2022년)
수백 년간 이어져 오며 여성 참정권 부여, 여성의 사회진출 독려, 그리고 남성의 가부장적인 의무까지 덜어내 온 페미니즘은 한국에서 지금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다.
“너 페미냐”라는 말을 욕처럼 내뱉는 이들이 넘치고, 페미니즘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려운 ‘볼드모트’(소설 해리포터 속 악역) 같은 취급을 당한다. 정치권에서조차 반(反) 페미니즘을 공공연히 외치며, “페미니즘은 싫지만 난 성평등주의자”라는 형용모순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일보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10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페미니즘’에서 ‘성평등’을 떼어 내려는 거대한 백래시 속에서, 페미니즘의 본질과 포용성에 대해 거듭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비(非) 페미’ 10명에게 성인지력 검사해보니
10대부터 50대까지 나이, 성별, 하는 일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이거나 잘 모른다는 3명을 제외하고는 ‘여성 우월주의’ ‘이기적인 집단’ ‘남성혐오’ 등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이 과거 성평등 의식을 측정하려 개발한 단축형 성인지력척도 검사 결과 10명 모두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이성관계, 사회문화영역에서 고르게 높은 성인지력을 보였다.
여성에게 얌전한 행동이나 옷차림을 강조하거나, 남자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사고에는 각각 90%와 70%가 반대했다.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은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가 집에서 살림하는 것’(그렇지 않다 90%), ‘직장상사가 남자일 때보다 여자일 때 불편하다’(그렇지 않다 80%)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남성은 업무기획과 추진력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데 동의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10명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실시해본 검사에서 주목할 점이 있었다. 성평등 의식은 높았지만, 성평등 정책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성평등정책들은 남성의 입장은 무시하고 여성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그렇다 30%·그저 그렇다 60%), ‘정부나 기업 등에서 여성을 위한 많은 제도가 있음에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요구만 한다’(그렇다 50%·그저 그렇다 20%)에 수긍 비율이 높았다.
소수 분파 페미니즘에만 주목해 거부
“’한국 남성들이 싫다’는 이유로 4B(비연애, 비출산, 비결혼, 비성관계) 운동을 남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여성 권리 신장 운동에서 크게 벗어난 것 아닌가.” 김지훈(25·이하 모두 가명)씨의 말이다. 고현종(52)씨 역시 “최근 페미니즘은 여성우월, 남성차별로 변질되고 있다”라고 본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은 사회의 극심한 여성 혐오에 맞선 강력한 맞대응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다”며 “이런 과정에서 유발되는 갈등이 페미니즘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되고 인식된다”라고 봤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도 “소수 집단은 어디에나 있는데 분파를 향한 비판을 페미니즘 전면으로 가져와 ‘페미는 정신병’으로 왜곡하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신 교수는 “여성혐오 진영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공격하려 페미라는 단어로 비난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의도적인 오해라는 뜻이다.
신 교수는 “페미니즘 자체는 민주주의라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두고 북한이나 중국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지 않나”라면서 “(페미니즘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사상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주차장’이 페미니즘? ‘여성혐오’ 정책
여성혐오는 이제 투표권 박탈 등 직접적인 억압이 아니라 취업·임금·승진 차별, 성범죄 만연 등 구조적이고 교묘한 형태로 전환됐다. 그러다 보니 “내가 겪지 않았으니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20대 여성인 박서은(27)씨 역시 “현재에 만족하기에 성평등을 목표로 무엇인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할 생각이 없다”며 자신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을 비롯한 해외 선진국에서도 꾸준히 ‘페미니즘의 종말’을 선언해 왔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났고 대학 진학률 등에서 여성이 사회적 성취를 이뤄 냈으므로 페미니즘은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만난 비 페미니스트들 역시 사회적으로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이 충분하며,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지나친 요구를 한다는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박씨는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여성 전용 주차장’은 모순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우대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혐오의 결과이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경기도에 있었던 버스의 여성 배려석 ‘핑크존’의 사례를 들었다.
또 이런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은 운전을 못한다’라는 색안경 탓에 확대되기도 했다. 이주희 교수는 여성 전용 주차장을 두고 “여성의 운전 능력이 남성보다 낮다는 편견과 여성의 가사전담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 소비의 주체로서 여성을 우대하려는 잘못된 상업적 고려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 우월주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덧씌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 더 혜택 받는데 ‘여성할당제’로 낙인
“페미니즘을 통해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우월적 지위를 원하는 것 같아서 싫다.” 문태석(32)씨의 말이다.
한국일보가 만난 비 페미니스트 중 문씨를 비롯한 7명이 하나같이 외친 이야기는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라는 것이었다. 휴스턴-다운타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트리스틴 J.앤더슨은 이런 현상이 “이미 성평등을 이뤘다”는 착각에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통념은 나아가 ‘여성들이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이제 성차별의 희생자는 남성’이라는 주장이 된다”라고 했다.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거나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제도에도 ‘피해자는 남성’이라는 망상이 횡행한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 교수는 “여성 할당제는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양성채용목표제와 같은 제도의 수혜자는 오히려 남성으로 나타나는데도 ‘남성의 피해’라고 주장하곤 한다”면서 이를 ‘상상적인 피해’로 인한 거부감이라고 했다. 이주희 교수 역시 “우리나라에서 할당제는 성중립적인 제도”라고 설명했다.
페미니즘, 남성을 가부장 족쇄에서 해방
오늘날을 여성상위시대라고 보는 남성 임진환씨(44)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가 집 안에서 살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남자는 될 수 있으면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라고 여긴다. 임씨의 이런 부담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남성도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군(軍) 복무도 마찬가지다. 군 복무는 남성 역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지만 군대에 여성을 들이지 않았던 건 페미니즘이 아니라 가부장제 탓이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하려 “여성도 군대 가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이유가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고 나라를 떠받드는 일이 남성만의 몫이라는 가부장적 사고를 더 이상 지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군 복무는 페미니즘에서 오래 연구하고 논의해 온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페미니즘의 갈래마다 결론은 갈린다. 실제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얻는 차원에서 여성의 군 복무를 독려하기도 했다.
다만 논의의 방향이 여성의 군 복무 여부에만 쏠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김 외래교수는 같은 책에서 “여성이 군대에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군대는 갈 만한 곳인가’를 묻는 게 더 나은 논쟁 방향”이라며 “젠더 갈등이 아니라 군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전혼잎·최나실·최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