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도대체 왜 이래요?”
점심시간,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접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강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강 할머니가 먹다 남긴 반찬을 옆 사람 그릇에 인심 쓰듯 옮겨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양로원에서 어르신들과 지내다 보면 베풂이라는 선행 뒤에 숨겨진 모순을 자주 목격한다. 평생 ‘보여주기식’ 삶에 길들여진 강 할머니에게 나눔은 그저 선함의 제스처다. 상대방에게 그것이 필요한지, 혹은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지는 안중에도 없다.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을 처리하면서 ‘나누어 주었다’는 만족감만을 챙기는, 상대의 감정에 눈을 감은 무례함 일 뿐이다. 당뇨로 식단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비싼 거니 괜찮다”며 먹다만 과자나 빵을 억지로 쥐어 주는 투박한 호의는, 받는 이에게 그것은 달콤한 간식이 아니라 처리하기 곤란한 짐이자 건강을 위협하게 된다.
일방적인 호의는 때로 친절의 탈을 쓴 폭력이다. 내가 주는 것이 상대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자기만족에 취한 선행은 진정한 베풂이 아니다. 그저 '나는 무언가를 베푸는 선한 사람'이라는 자아도취적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타심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다. 결국, 준비되지 않은 상대에게 억지로 밀어 넣는 호의는 상대를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가 아닌, 나의 선행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다.
나 역시 타인을 위해 사는 것만이 이타심이라 믿었다. 부탁을 거절한 날이면 죄책감에 밤잠을 설쳤고, 내 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욕심으로 치부하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강 할머니의 행동을 볼 때마다 상대가 달가워하지 않는 친절이 과연 선행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나도 진정성 없는 껍데기뿐인 베풂으로 내 안의 결핍을 감추며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흔히 이타주의를 ‘나를 희생하는 것’이라 정의하지만, 내 안의 샘이 말라 있다면 어떻게 타인의 갈증을 축여줄 수 있겠는가. 베풂의 진정성은 나를 억지로 깎아내는 고통이 아니라, 내 안의 풍요가 차고 넘쳐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올 때 시작된다. 나를 온전히 세우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타인의 삶을 지탱할 진정한 여유도 생겨나는 법이다.
나를 돌보지 않는 선행은 결국 나를 지치게 하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을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타인의 아픔도 있는 그대로 보인다. 내가 평화로울 때 건네는 따뜻한 눈빛 한 번이, 형편을 헤아리지 않은 채 밀어 넣는 사탕발림보다 훨씬 숭고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 잔이 비어가는 줄도 모른 채 남의 잔을 채우려 허덕였고, 그 허기짐을 이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 것은 아닐까.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마시며 내 마음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내 마음의 샘에서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데 어찌 타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으랴. 내 안의 풍요로움이 밖으로 흘러넘칠 때 진정한 베풂이 시작된다는 진리를 믿으며, 이제는 나를 먼저 채우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껍데기뿐인 이타심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먼저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은 생애에 내가 세상에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도 위대한 봉사라고 확신한다. 빈 잔으로는 그 누구의 갈증도 채울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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