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1 참사에 스러진 한인 희생자들
26세 청년부터 두 살 딸 둔 아버지까지
남겨진 가족들 사반세기의 세월 견뎌
한인 젊은이들의 꿈 속속‘장학사업’으로
“기억하는 한 그들의 레거시는 영원히”

“25년의 세월도 그 비통한 아픔을 씻어내지는 못하지만,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미 합중국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기록된 2001년 9.11 테러. 미국 본토가 가공할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범들에 의해 무참히 공격당해 3,000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전대미문의 9.11 테러가 11일로 발발한지 25주년이 된다. 25년 전 그날 미국의 수퍼 파워의 상징이던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미국인들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뇌리에 화인처럼 각인돼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았다. 당시 무고하게 스러져 간 총 2,997명의 희생자들 중에는 뉴욕과 워싱턴 등에서 활동하던 한인 20여 명도 포함됐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급격하게 변한 미국사회는 여전히 격변의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다시 불러보는 9.11 한인 희생자들의 이름들은 25년 전의 충격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땅에서 삶을 일구던 평범한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었다. 월가의 금융회사에서 앞날을 펼쳐가던 20대 청년, 결혼을 앞둔 30세 여성, 어린 자녀를 둔 가장, 미국 정부와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박사과정을 밟던 연구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가, 어떤 이는 단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무역센터를 찾았다가, 또 어떤 이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LA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25년이라는 세월은 당시 두 살이던 아이를 20대 후반의 성인으로 만들 만큼 긴 시간이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서며 건넨 마지막 인사와 전화통화, 끝내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던 시간이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월가 청년의 꿈, 장학사업으로
희생자 가운데 가장 젊은 한인 중 한 명이었던 김재훈(미국명 앤드류)씨는 불과 26세였다. 뉴저지 리오니아에 살던 김씨는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금융회사 프레드 앨거에서 리서치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CFA 시험에도 합격하며 금융전문가로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피아노와 클라리넷, 기타를 연주했고 학창시절에는 마칭밴드와 재즈밴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교회에서는 청소년들을 돌봤다.
그가 떠난 뒤 가족은 앤드류 재훈 김 메모리얼재단을 설립했다. 본보가 9·11 20주년이던 지난 2021년 당시 부친 김평겸씨를 인터뷰했을 때까지 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200명이 넘었다. 스물여섯에 멈춘 한 청년의 삶이 다른 젊은이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장학사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육성아(미국명 크리스티나)씨는 25세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오하이오주로 이민온 그는 미시간대를 졸업한 뒤 캔터 피츠제럴드 인사부에서 근무했다. 2001년 9월11일 아침 그는 북타워 104층에 있었다. 이후 가족과 지인들은 그의 이름을 딴 크리스티나 성아 육 메모리얼 장학금 재단을 설립해 젊은이들을 지원했다.
■LA 가족 만나러 오다가
남가주 한인들에게 특히 가슴 아픈 사연은 수 김 핸슨씨 가족이다. 당시 35세였던 핸슨씨는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보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생물·면역 관련 연구를 하고 있었다. 9월11일 그는 남편 피터 핸슨, 두 살배기 딸과 함께 보스턴에서 LA로 향하는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에 탑승했다. LA의 가족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LA에 도착하지 못했다.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UA 175편은 이날 오전 9시3분 세계무역센터 남타워를 들이받았다. 핸슨씨 부부와 딸까지 모두 희생됐다. 세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은 지금도 9·11 메모리얼에 보존돼 있다. LA에서 이들을 기다렸을 가족들에게 9월11일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은 기다림으로 남아 있다.
■새 직장 이틀째 맞은 비극
로렌스 돈 김씨는 31세였다.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으로 정보기술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마시&맥레넌의 정보기술 부문 시니어 매니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2001년 9월11일은 새 직장에 출근한 지 불과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날 오전 7시30분에서 8시 사이 세계무역센터 북타워에 도착한 것으로 주차기록에 남아 있다. 잠시 뒤 북타워는 납치된 아메리칸항공 11편의 공격을 받았다.
김씨는 독학으로 독일어를 배워 프로이트와 하이데거, 괴테의 저작을 원문으로 읽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셀린 디온의 음악을 좋아하고 고향팀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평범한 젊은 미국인이었다. 이제 막 새로운 직장에서 펼쳐질 그의 미래는 두 번째 출근날 아침 멈춰버렸다.
■결혼 앞둔 30세 여성
조경희(미국명 케이시)씨는 당시 30세였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뉴저지 클리프턴에서 홀어머니와 언니, 어린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 역시 마시&맥레넌에 입사한 지 불과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입 직원이었다. 9월11일 아침 조씨는 세계무역센터 북타워 99층에 있었다. 25년이 흐른 지금도 뉴욕 9·11 메모리얼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일이면 이름 곁에는 꽃과 사진이 놓인다.
■임시직에서 월가 부사장까지
추지연(미국명 파멜라)씨의 삶은 한인 이민자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대로 보여준다. 1970년 한국에서 태어난 추씨는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뉴욕주립대 버팔로를 졸업한 뒤 세계적 금융회사 캔터 피츠제럴드에 임시직으로 입사했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한 단계씩 올라가 약 10년 만에 포트폴리오 트레이딩 그룹의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당시 나이 31세였다.
■두 딸 남긴 아버지
캔터 피츠제럴드에서 일했던 강준구씨는 당시 34세였다. 시스템 분야에서 일했던 그는 2001년 아내와 네 살, 두 살 등 어린 두 딸을 둔 가장이었다. 강씨와 아내의 사랑을 상징하는 특별한 사연도 남아 있다. 그는 아내에게 청혼하면서 그녀를 그리워할 때마다 하나씩 접었다는 종이학 1,000마리를 선물했다. 감기에서 회복 중이던 그는 9월11일 아침 출근했고,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이 됐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가족과 지인들은 도미니카공화국에 강준구 메모리얼 스쿨을 세워 그의 이름과 나눔의 정신을 이어갔다.
■세월은 흘러도 이름은 남아
2001년 9월11일 이후 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그날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가 이제 성인이 됐고, 당시 어린아이였던 희생자들의 자녀들도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뉴욕의 스카이라인에는 다시 초고층 빌딩이 솟았고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추모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곳에 새겨진 이름들은 25년 전 그대로다. 그 이름 하나하나 뒤에는 이루지 못한 꿈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부모와 자녀, 배우자를 기다렸던 가족이 있다. 그리고 일부 희생자의 이름은 장학재단과 학교, 추모사업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세대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25년이라는 세월은 상처를 조금 무디게 할 수는 있어도 그날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9·11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늘어날수록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희생됐는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전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이름은 남았다.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들이 남긴 삶과 레거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25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다시 9·11 한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다.
![9.11 25주년을 맞아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제로의 희생자 추모 동판에 꽃이 놓여 있다. [로이터]](/image/fit/296601.web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