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불편해서 호숫가에 갔다. 부대끼는 속을 달래는 방법은 걷거나 모로 누워 자는 거다. 비 온 후라 시원해서 걷기를 택했다. 전자는 이해하지만, 후자를 들은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알려주신 방법인데, 철석같이 믿고 써왔다. 머리가 땅에 닿으면 2분도 안 돼서 깊은 잠에 빠지는 복까지 받아 한잠 자고 나면 속이 편해지곤 했다.
과식의 주범은 밀가루 음식이다. 소화력이 떨어지는지 요즘은 밥을 먹어야 속이 편한데, 포기를 못 하니 사서 고생이다. 뭘 먹을까 생각하면 면류만 떠오른다. 국수는 국적에 상관없이 좋아하는데, 단연 한국 국수가 최고다. 그래서 매주 건어물과 채소, 표고버섯, 다시마 등을 넣어 국물을 만든다. 모든 재료를 냄비에 넣고 물을 부은 후 뚜껑을 닫아 하룻밤 재운 후 아침에 끓이면 같은 재료라도 훨씬 진하고 맛있다. 국, 찌개에 쓰기도 하고 딸이 좋아하는 어묵탕이나 우동을 바로 끓여줄 수 있어서 해 놓으면 든든하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의 음식이 있다. 내겐 아버지가 끓여준 칼국수가 그러하다.
김치와 멸치 끓인 물에 젖은 국수를 넣었을 뿐인데 너무 맛있었다. 아버지는 늘 내 그릇에 당신 국수를 넘겨주셨다. 그 손길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이를 기르며 알게 되었다. 딸이 좋아하는 우동을 먹을 때면 나도 그렇게 된다. 이젠 세상이 좋아져서 문밖에만 나가면 세계 각국의 국수를 사 먹을 수 있음에도 아플 때면 아버지표 칼국수가 그립다. 아버지가 할 줄 아는 요리는 그뿐이었다. 국수 대신 밥을 넣기도 했는데 그것도 맛있었다. 요즘도 김칫국을 끓이면 막판엔 밥을 넣어 끓여 먹는다. 남편이 개죽 같다고 놀린다. 음! 그 맛을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다.
수필반에서 수강생에게 내주는 과제 중 하나가 음식에 관한 글이다. 음식엔 추억이 공존한다. 글로 쓰다 보면 기억 저편에서 그리운 시절, 사람, 장소, 음식이 줄줄이 소환되어 이내 멋진 글 밥상이 차려진다. 글벗들과 나누며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추억의 음식은 그리움을 달래주는 명약이기도 하다. 먹으면 거뜬히 일어나기도 하니까. 가난한 기억일지라도 추억할 것이 있다는 건 무형의 재산이다.
우박, 폭풍, 폭우, 정전으로 암흑이었던 날,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도시를 휩쓸었던 폭풍이 지난 후 냉동실에서 살아남은 갈비로 찜을 만들었다. 가족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지 못했던 일상에 감사했다. 벗어나고 싶었던 부엌에 불이 들어오니 얼마나 고맙던지, 무수리는 바보처럼 할할 웃었다. 먼 훗날, 내 딸은 어떤 음식이 그리울까. 나를 추억할 음식이 있긴 한 걸까. 사뭇, 궁금하다.
<박인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