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이 말씀은 천상에서 온 하늘나라의 최고 메신저는 메시아 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사실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스트 플랜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천상의 최고 메시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함>이라는 영적 깨달음으로 진솔하게 피력하였습니다. “일을 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그대인데 어찌하여 쉬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위로보다 참는 일을, 희락보다 십자가 지는 일을.” 예수님께서 가지신 세 가지 미션 중에 <제사장 직>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십자가를 지셔야 할 운명이셨습니다. 돌아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을 우리는 숙명이라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선택하여 성육신하셔서 오셨으므로 빌립보서 2:5-6절에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속에는 예수님의 운명적 선택이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로 이 타고난 운명의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전제로 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과거형의 시제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겸손하게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의 대서사시라는 것을. 이 말씀은 세 가지의 특성을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성과, 보편성과 영원성>입니다. <일을 해야 할 운명>은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멈추거나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옵니다. 천상의 최고 메시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가장 뚜렷한 하나님의 은총은 <영적 위로와 기쁨>입니다.
천상의 최고 메시지의 첫번째 특성인 희생성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따르는 대가성 희생은 인간의 말로 형용하기에 적합한 단어를 찾는다는 것이 실로 엄청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십자가의 희생을 누군가가 치러야 하는 것이라 감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운명>이라 피력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이 어느 특정인에 대한 혹은 소수 그룹에게만 특혜를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저를 믿는 자마다”라는 말씀 속에서 모든 이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동사로서 현재형임과 동시에 미래형의 시제로 <미래형 현재동사>라는 최특유의 언약을 하십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결코 거짓된 자유와 지나치게 자신을 믿는 그런 <허구적인 세상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 즉 하나님의 은총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천상의 메신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천상의 최고 메시지를 대하면서 한가지 양심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적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원한 위로의 은총을 주시기에 한없이 너그러우시나 이 땅의 사람은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리는 감사에 서툴고 인색하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천상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영혼으로 스스로 반추해야 할 것은 높은 것이 반드시 거룩한 것으로 오인해서도, 기쁜 것이 모두 선한 일이 아님을, 지금 내 눈에 사랑스러운 것이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천상의 최고메신저,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요한의 입술을 통하여 주신 천상의 최고 메시지, 요한복음 3장 16절은 스스로를 항상 겸손하게 만드는 은혜와 나를 더욱 부정하게 하는 그 은혜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함>의 경건의 훈련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멈추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항상 조심하면서 겸손해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