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식 -
해가 저무니 하늘은 어둠을 머금고
日暮天含黑(일모천함흑)
산은 공허한데 절은 구름 속에 잠겼네
山空寺入雲(산공사입운)
군신에겐 천년의 의리가 있는데
君臣千載義(군신천재의)
어느 곳에 외로운 무덤이 있는가!
何處有孤墳(하처유고분)
<선비의 의리(義理)>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이 시(詩)는 김식이 자결(自決)하기 전에 읊은 절명시(絶命詩)다.
간악(奸惡)한 자들의 모함(謀陷)으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앞길이 창창(蒼蒼)한 선비의 심경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권력을 잡기 위한 모함에 아까운 인재들만 죽어 나갔다. 권력을 잡고 승진을 하기 위해 암투(暗鬪)와 모함을 자행(恣行)하지 않는 세상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임금과 신하 사이엔 천년을 이어갈 의리가 있다고 읊은 선비의 말은 세월이 흘렀어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성종, 중종 때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본관(本貫)은 청풍(淸風), 아호(雅號)는 사서(沙西), 동천(東泉), 정우당(淨友堂), 자(字)는 노천(老泉), 시호(諡號)는 문의(文毅)이다.
벼슬은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여 시행할 것을 주장하고 추진했던김육(金堉)은 그의 현손(玄孫)이다.
김식은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광조'와 함께 욍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정치개혁을 추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流配)되었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連累)되어 절도(絶島)로 이배(移配)된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 거창 산속으로 몸을 피하여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自決)하였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자결할 당시 그의 옷 소매에 들어 있던 '남곤'과 '심정'의 간악(奸惡)한 죄상(罪狀)을 밝힌 상소문(上疏文)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의 충절(忠節)을 기리어 명종 때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선조 때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종우 이한기(미주한국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