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삶의 저물녘에서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추억의 단면을 하나하나 펼쳐 나가고 싶다.
며칠 전 한국으로부터 50년 지기 기영의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 기간을 무사히 통과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서로 반가워하며 기뻐했다.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건강의 덕담을 하며 친구들의 안부를 두루두루 묻게 된다. 이내 통화 종료 후 지난 13년 전 추억이 새로워 옛 친구 기영과의 재회를 떠올린다.
그때 한국에서 LA 자녀(딸)의 가정을 방문한 친구 기영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반가움과 기쁨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화로 들려오는 그의 들뜬 감정의 일성은 내일 애틀랜타로 갈 것이니 공항에 마중 나오라는 격정적인 외침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 옛 친구를 만난다는 기쁜 마음에 흥분해 잠을 설치게 되었다.
공항에서 막역지우와 얼싸 안은 채 서로 건강한 모습의 젊음을 확인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한국에서 떠나온 후 십 년이 훨씬 넘어 이국에서 만나는 기쁨에 감격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속에서도 꿈같은 순간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 쌓인 회포를 풀며 마냥 즐거움에 취했다. 그와 나는 30대 초반에 건설 회사 입사 동기에 가까웠다. 나는 결혼을 한 신혼이었고 그도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이라 결혼식은 미루고 있었다. 경기도 여주 출신인 그는 건장한 체격에 배우 못지않게 잘 생긴 용모와 남자다움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의 직선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식이 없었다. 업무 처리 능력도 치밀하고 소신을 피력하는데 언변이 뛰어나 거침이 없었다.
다른 친구 충북 충주 출신인 용기는 일 년 늦게 입사한 미혼이었지만 입사 후 연애하던 여성과 이내 결혼을 했다. 나보다 용기는 나이가 두 살 아래였고 기영이는 세살 아래였었다. 우연하게도 세 사람은 고을 출신이었다. 실향민인 나는 의주, 기영이는 여주, 용기는 충주이었다. 아름다운 고을 여주에서 태어난 기영이는 맑은 사람이었고 용기는 충성심이 강했다. 고향이 의주인 나는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 심히 부끄러운 사람이다. 친구들이 나에게 ‘삶의 열정이 있고 학구적’이라는 말에는 조금 위로가 되었지만 말이다.
셋 중에서 신장이 제일 큰 용기는 성실했고 정직했으며 유머 감각이 뛰어나 그와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나 웃음과 즐거움이 넘쳤다. 그의 위트와 유머는 두고두고 웃음을 자아내는 청량제 구실을 했었다. 우리 세 친구는 한 직장에서 15년 이상 근무하며 우정을 쌓았고 서로의 가정을 왕래하는 허물없는 사이라 퇴직 후에도 세 부부가 함께 만나는 모임이 있었다. 기영이는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친구이다. 나의 부친상 때도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수고를 하며 3일 동안 곁을 지켜주었다.
IMF 때도 나의 사업체 화랑(갤러리)가에 찬바람이 불었을 시기에도 도움을 받았었다.
다음 날 나의 생업인 가정집 청소를 오전 일정만 기영이와 함께 소화하기로 했다. 눈썰미가 있는 기영은 LA 딸 집에서 청소기를 다루는 요령을 이미 습득해 청소를 곧잘 했다.
기영의 도움으로 청소를 수월하게 끝낸 후 한국 식당으로 달려갔다. 기영이는 미국에서도 쉽게 한식을 먹을 수 있음을 좋아했다. 식사를 마친 후 미드타운 소재지 “애틀랜타 역사박물관”을 찾아 남북 전쟁의 참상과 전시된 유품들을 관람했다.
다음 일정은 다운타운으로 이동해 “코카콜라” 본사 전시관과 수족관을 관람 후 다운타운의 명소 햄버거 전문점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혼잡한 퇴근 시간을 피해 서둘러 귀가했다. 이틀째 되는 날 일정도 청소를 마치고 애틀랜타 동쪽 먼 곳에 있는 “스톤 마운틴: 돌산”을 찾았다.
남북전쟁 때 남부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 “스톤월 잭슨” 장군과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대통령의 모습이 조각되어있는 돌산을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라 숲에 파묻힌 애틀랜타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터트렸던 추억이 새롭다. 친구와 함께 이틀의 일정을 기쁜 마음으로 아주 쉽게 소화하며 지냈다. 저녁 시간에 우리는 옛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마냥 즐거워 웃음꽃을 피웠다.
삼일이 되어 친구 기영이가 LA로 오후에 떠나는 날 북쪽 “레이크(호수) 레니에”를 찾아갈 시간이 어중간해 일찍 애틀랜타 공항으로 출발했다. LA에서 먼 곳 애틀랜타까지 찾아와 친구의 삶의 현장에 동참해 격려와 도움을 준 고마운 친구가 떠나가고 있다. 친구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아쉬운 순간,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주차장에서 이륙하는 비행기의 소음에 묻힌 나의 통곡은 점점 고조되어갔다.
항공기는 굉음을 내며 높이 비상하는데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 13년 전, 애틀랜타 관광 명소에서 친구 기영이와 함께했던 일정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젖어들고 있다. 언제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지우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인도하신 기영이는 어느덧 삶의 저물녘에서 더욱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