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본향을 준비하는 나그네(Pilgrim)>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나그네”로 예정하셨습니다. “족장들의 시대(Patriarch)”를 연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사람이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1,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평생 머물다 갈 집을 마련하셨던 “아버지(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예정은 “한 곳”에 정착하여 머물지 말고 “떠나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스스로가 <나그네(Pilgrim)>임을 삶을 통하여, 발자취를 통하여, 마지막 죽음의 임종순간까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연분의 파트너인 <사라>를 상처(喪妻)하여 눈앞이 아득한 그 순간, 자신을 위해 돕는 배필의 역할을 다한 아내 사라를 위해 장지(葬地)를 준비할 때도 자신이 <나그네(Pilgrim)>임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였습니다.
창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버지,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인생은 <나그네(Pilgrim)>에 불과함을 증거하였습니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이르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 이니 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평생 하나님의 친구로 살다 친구인 하나님을 위해 온 몸과 온 마음을 다바쳤던 당대의 성군인 다윗 왕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나그네(Pilgrim)>라 증거하였습니다(행13:22).
역대상 29: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당대의 문호, “세익스피어(Shakespeare)”는 이 믿음의 아버지, 다윗이 고백한 인생을 <그림자>에 비유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영감으로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Life is but a walking shadow).”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을 “믿음의 아버지(조상)”로 두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저 위대한 산상설교의 첫 대지인 “팔복(The Beatitudes)”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을 사모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마 5:1,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삶을 “나그네”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야곱, 아버지 다윗은 그들의 삶으로 이 <나그네의 삶(Pilgrim)>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시면서 “나그네”의 삶을 종결하십니다. 인생을 훌훌 털어버리고 지팡이 하나에 의존하여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 무덤 앞에서, 또 당신께서 묻힐 가묘를 쳐다보시면서 쓸쓸히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하염없이 마지막 눈물을 쏟아내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도 그 눈물을 흘리시고, 그 한숨을 내 쉬시면서 <나그네(Pilgrim)>의 삶을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 야곱, 다윗이 바라본 그 본향, 천국을 내 아버지도 동일하게 쳐다보시며 마지막 임종의 순간이 하루 하루 다가옴을 <침묵의 기도>로 소망 가운데 맞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나그네”가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될 때, 비로소 “본향”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히11:16).